얼마 전 신입 PD와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히 휴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무 뜻 없이 올해 휴가는 언제쯤 갈 거냐고 물어보자 신입 PD는 우물쭈물하더니 선배들이 가라고 할 때 가겠다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너무 놀라서 휴가는 본인이 가고 싶을 때 가는 거지 누가 정해준 시기에 가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알려주었습니다. 잠시나마 수평적인 문화가 회사에 조금은 깃든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10여 년 전 제 신입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지겹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얘기하자면 홈쇼핑은 새벽 6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끊임없이 생방송이 송출됩니다. 그 말인즉슨 새벽에도 누군가는 방송을 위해 회사에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처음 배치된 PD팀은 유독 늦은 새벽 방송이 많은 팀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늦은 새벽 방송을 자주 하는 선배 PD의 부사수로 늘 새벽 1시와 새벽 2시 방송을 번갈아가며 참관하고 때로는 방송을 진행했습니다. 퇴근 후 고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면 빨라야 새벽 3~4시였지만 신입은 누구보다 빨리 출근해야 된다는 마음에 늘 7시 30분까지 사무실로 다시 출근하고는 했습니다. 그 누구도 저에게 새벽 방송 후에는 오후 출근을 해도 된다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와 같이 방송을 진행한 선배는 늘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었습니다.
일주일에 네댓 번씩 이런 스케줄을 소화하고 주말에도 꼬박꼬박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는 생활을 한지 두 달여.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육체였지만 안구와 피부 등에서 건강 적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왔고 점심을 거른 채 병원을 다녀오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 누구도 저에게 그렇게 오랜 시간 근무하면 큰일 나니 휴식을 취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수면 시간이 부족하니 일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지고 기억력에 문제가 온 것처럼 해야 할 일을 깜빡하는 경우가 몇 번 생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배 PD에게 호되게 혼나고 신입으로서의 태도가 안되어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수록 긴장한 저의 출근시간은 더 빨라졌다. 그 누구도 저에게 일하면서 힘든 일이 있는지 요즘 뭐가 문제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눈에 띄게 건강이 나빠지고난 뒤에야 당시 팀장님이 저의 모습에 놀란 듯 새벽 방송 스케줄이 있으면 다음날은 조금 늦게 나와도 된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건넸습니다. 비로소 저는 새벽 2시 넘어 퇴근을 하고 다음 날 11시에 출근하는 달콤함을 맛보았습니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일은 기억에서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 선배가 다음날 늦게 출근하라는 이야기 한마디만 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떨쳐지지가 않습니다. 선배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새파란 신입에게는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었던 일이었음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는 천성이 남을 잘 챙기거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때의 기억 때문에 후배들, 특히 신입사원들에게는 미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는 편입니다. 휴가는 본인이 원할 때 가면 된다, 퇴근할 때는 인사 없이 가도 된다, 밤 스케줄이 있으면 절대 아침에 출근하면 안 된다, 선배들 식사를 꼭 너희들이 챙길 필요 없다, 중요한 스케줄이 있는 날 방송 배정은 언제든 말해서 변경을 요청해라 등등 선배가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피해를 감내한 채 회사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사항들을 미리 이야기해줍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신입이 어떻게 그러나요..' 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후배들을 보며 아직 수평적인 회사 문화로 가는 길이 멀다는 걸 느끼지만.
아직은 요원해 보이지만 선배가 요즘 힘든 일 없냐고 물어볼 때 속사포 같이 불만을 쏟아내는 후배의 모습이 자연스러운 회사의 모습을 언젠가 볼 수 있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