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방송을 진행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식품 방송에서 맛있는 음식은 필수이기에 방송 내내 조리를 해줄 요리사가 꼭 필요합니다.
하필 이날 방송이 늦게 확정되는 바람에 모든 요리사들의 스케줄이 차있었고 TV 방송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 모바일 방송이라 더욱 섭외가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상품이 에어프라이어에 돌리는 빵 생지라 조리가 어렵지는 않아 자체적으로 해볼까 했지만 스탭이라고 해봐야 PD 하나에 카메라 감독 한 명이라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아이디어였습니다.
방송을 취소해야 하나, 미뤄야 하나 등의 이야기가 오갈 무렵, 마침 방송 시간대 즈음해서 TV 방송에 식품이 편성되어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리나케 요리사에게 전화를 걸어 TV 방송 때문에 요리 준비를 할때 빵을 구워만 주면 우리가 가져가서 세팅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부족한 건 우리가 방송 내내 에어프라이어를 돌릴 테니 준비만 좀 부탁한다고 사정을 했습니다. 고맙게도 요리사는 흔쾌히 수락을 했고 바쁜 와중에도 매우 넉넉하게 빵을 미리 구워두었습니다.
하지만 뭐 세팅만 하면 되지 생각했던 제 생각이 짧았음이 바로 드러났습니다.
빵과 함께 곁들일 우유를 사고 그 우유를 부을 컵을 닦고 커피를 내리고 또 컵을 찾고.. 접시에 빵을 담았는데 또 어찌나 안 예쁜지..
방송이 시작되고 호스트는 늘 하던 대로 진행을 하며 중간중간 필요한 빵을 요청했습니다. 요리사가 있을 때는 귀신같이 타이밍이 맞던데 서로 사인이 맞지 않아 호스트가 한참을 기다리고 잘못된 빵이 구워지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급하게 꺼내려다 달궈진 에어프라이어에, 또 뜨거운 빵에 손이며 팔등을 데고.. 왜 자꾸 호스트는 새로운 포크와 나이프를 또 찾는지..
11년 방송을 진행해온 베테랑이라고 자부했건만 이날 방송은 정말 신입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겨우 방송을 마치고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못 차렸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방으로 가서 방송에 쓴 모든 접시와 컵, 집기들을 설거지하는데 허리는 어찌나 또 아픈지..
정리가 끝난 후 요리사에게 가서 오늘 방송의 어려움을 호소하려니 대뜸 요리사가 물어봅니다.
"빵 생지 방송은 난이도 최하인데.. 그리고 오늘은 빵도 미리 구워놓았고.. 저희 입장에서는 진짜 쉬운 방송이에요. 평소에는 모르셨죠?"
그 순간 왠지 모를 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평소 요리 개수가 많아 힘들다던 요리사들의 불만을 가볍게 듣고 그냥 요리해서 방송 때 넣어주는 게 뭐가 그리 힘들어?라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제가 제일 힘들고 주변 스탭들은 그냥 보조로 쉬운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요리사들에게 절대 무리한 요청을 하지 않고 혹여 방송 중 필요한 요리가 완성이 덜 되었어도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시간을 드립니다. 한번 해보니 그들의 노고와 어려움이 보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홈쇼핑 PD들 역시 매출을 위해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연중에 스탭들을 탓하기도 하고 본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심취해있기도 합니다.
오늘따라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가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