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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May 30. 2018

낯선 곳에 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갔다. 매년 휴가마다 떠나는 여행이지만, 이번 여행이 특별했던 이유는 5년 만에 유럽 땅을 다시 밟았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길수록 마음에서 느끼는 거리도 멀어진다. 마음의 거리가 멀어서일까. 런던 사람들에게는 일상일 ‘UNDERGROUND’라고 쓰인 지하철 표지판이 보이는 거리가 왠지 예술사진에 나올 것 같은 풍경으로 보였다.



기술이 많이 발전했다는 소리를 평소 입에 달고 사는 인데, 여행에서는  발전한 현대 기술을 쏠쏠하게 사용한다. 구글맵 하나면 어디든지   있다. 그러나 지하철 어느 칸에서 내려야 조금이라도 회사에 빨리 도착해 지각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몸으로 수없이 익히고 이동했던 것만큼 편하지는 않다. 여행지에서는 계속해서 출구를 확인하고,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걸어서 이제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30대의 다리와 발에 부담을 주지 않을  있다.


이렇게 일주일 넘게 시간을 보내다, 한국으로 돌아와 살고 있는 아파트 문을 들어선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머리로 생각할 틈 없이 몸이 먼저 움직이고, 확인하지 않아도 무의식 중에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익숙함. 이런 것들이 새로운 풍경보다 더 좋은 걸 보니 세월이 지나며 변한 것이 또 하나 있었구나 싶었다.




자연스레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을 또 느낄 것이라 직감했다. 2주 뒤면 20년 간 살았던 동네를 떠난다. 계속 오르는 전셋값에 등 떠밀려 서울 외곽으로 가다가 경기도로 넘어가기 직전 어딘가에서 멈췄다. 원래 살던 곳에서 완전 반대편이다. 처음 집 계약을 하러 간 날부터 이사 가기 싫다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버터와 치즈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토스트를 주문해도 어떤 걸로 하겠냐고 묻지 않고 ‘버터죠?’하고 물어보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단골 카페. 냄새가 나지 않는 좋은 한우를 파는 단골 정육점.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로 바꿔주는 미용실. 이 모든 걸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 생각 없이 살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삶 속의 많은 부분이 확실함 속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낯선 동네에서 무엇 하나를 사도 이게 내 마음에 들까, 실패하진 않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한동안은 회사가 있는 지하철역 6번 출구와 가장 가까운 지하철 칸을 계속 외우고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이동할 수 있도록 익혀야 한다. 구글맵을 켜고 낯선 환경에 있었던 여행에서의 순간들처럼 말이다. 아, 불확실함이란 생각만 해도 피곤하구나.


살면서 수없이 불확실함과 부딪히게 된다. 앞에서 말한 여행이나 이사도 있고, 이직도 있고,  오래전에는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곳에 풀어놔도 엄청난 친화력으로 누구와도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일단  사람나는 아닌 게 확실하다. 어쨌든, 나는 지금 낯선 곳에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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