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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Sep 29. 2021

젤리의 추억

[월간 무쓸모] 나의 소울푸드는?


 치킨도 삼겹살도 먹지 않고 1년 정도 보냈던 시절이 있다. 새내기의 어리바리함도 사라지고 앞으로 무엇을 먹고살지 고민을 시작하던 대학교 3학년 봄 학기가 시작할 무렵,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더 심해져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가려워 수면부족으로 제대로 된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 정도가 되어 찾아간 병원에서는 앞으로 먹으면 안 되는 음식 리스트가 담긴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 10년도 훌쩍 더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금지 음식들은 밀가루, 인스턴트, 기름이 많은 고기, 튀긴 음식 등... 평소에 즐겨먹던 모든 음식을 하루아침만에 모두 끊게 되었다. 수면욕 > 식욕인 나에게 다른 음식들을 끊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딱 하나, 이것만은 끝내 끊지 못한 채 종종 먹곤 했었다. 젤리.


 더 과거로 돌아가면 언니 동생과 젤리 한 봉지를 두고 다투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엄마가 장 볼 때 비닐봉지 한 가득 우리 삼 남매가 먹을 과자와 간식들을 잔뜩 사 오면 언니와 동생과 함께 봉지에 달려들곤 했다. 다 같이 집에 있을 때는 누군가 "나 초코송이 먹는다?" 하고 외치면 나머지 두 명이 와다다 달려와서 함께 먹었지만 문제는 누군가 부재할 때 벌어졌다. 집에 있는 사람이 참지 못하고 과자를 먹으면 나중에 집에 돌아온 사람은 왜 너만 먹냐 나도 먹자하며 싸움이 시작되고 반복된 다툼에 지친 우리 삼 남매는 규칙을 정했다. 누가 있든 없든 무조건 간식은 3 등분하고, 자기 몫만 먹기.


 다른 간식들은 개수를 정확하게 나누어 공평하게 배분했지만 문제는 '왕꿈틀이'였다. 왕꿈틀이 젤리 봉지 안에는 두 가지 색상으로 이루어진 꿈틀이 젤리가 여러 개 들어있는데 콜라맛이 나는 '왕꿈틀이'만큼은 딱 하나가 들어있었다. 한 개 밖에 없다는 희소성은 공평한 분배를 어렵게 했고 우리는 결단을 내렸다. 왕꿈틀이를 정확하게 3등분으로 잘라서 한 조각씩 먹기로. 이 일화를 주변 지인들에게 들려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는 (쪼잔하다는 뜻이다) 반응이 종종 보였지만,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어른이 되어 젤리 한 봉지가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을 때의 그 만족감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젤리를 원하는 만큼 사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이제는 젤리 사냥꾼이 되어 세상의 모든 맛있는 젤리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린 시절 가장 많이 먹은 젤리는 위에서 말했던 왕꿈틀이와 마이구미였다. 여러 가지 맛이 들어있는 왕꿈틀이와 달리 마이구미는 포도맛 젤리만 들어있다. 그래서 한 봉지를 다 먹으면 좀 질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하기에 자주 먹곤 했다. 그다음 알게 된 젤리이자 아직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젤리는 사우어 젤리다. 원래는 트롤리 사우어 젤리가 정확하게 내 취향이었는데, 언젠가 갑자기 리뉴얼이 된 후 본연의 상큼한 맛을 잃어버려 한동안 많이 속상했었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회사를 퇴사하고 떠난 유럽여행에서 리뉴얼되기 전 바로 그 트롤리 사우어 젤리를 다시 발견했을 때는 어찌나 반갑던지. 장기여행 중이라 짐을 최대한 줄이던 중에도 젤리는 몇 개를 사서 캐리어 가방 안에 쟁여놓고 먹었었더랬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내 기억 속 트롤리 사우어 젤리와 거의 비슷한 맛을 가진 젤리를 발견했다. 츄파춥스 사워 게코 젤리다. 꿈틀이에 발이 달린 도마뱀 같은 모양의 젤리 겉면에는 신 맛이 나는 가루가 묻혀 있고 다양한 과일 맛을 상징하는 알록달록한 색상이 돋보인다. 이 젤리를 발견하고 어찌나 기뻤던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이 젤리를 하나씩 꺼내 먹으면 곧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몇 년 전 내 취향에 부합하는 새로운 젤리를 알게 되어서 이 젤리도 편의점에 가면 종종 사 먹곤 한다. 이름은 프루팁스인데, 젤리 좀 먹는다 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면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마치 무림고수들끼리 서로 주고받을 법한 미소를 짓곤 한다.


 온몸이 가려워 잠도 자지 못할 정도면서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젤리가 왜 좋냐고 물어본다면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 젤리가 뭐라고. 내가 좋아하는 젤리는 수제로 만드는 고급 음식도 아니고 공장에서 찍어내는 인스턴트 젤리고, 젤리 그 자체로는 심지어 다 큰 성인이 먹기에는 왠지 겸연쩍은 느낌도 든다. 그래도 먹을 때 기분 좋고 먹고 싶을 때 구하기 쉽고 알록달록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면 이것만으로도 '소울푸드'의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맛있는 젤리가 발견되는 곳이 있다면 젤리 사냥꾼으로서 언제든지 먹으러 갈 준비가 되어있는 나의 소울푸드는 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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