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존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니면—우리가 ‘관측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걸까?
양자역학은 말한다.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라고.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상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흐름.
그걸 우리는 보는 순간에야 ‘존재’로 부른다.
그렇다면 감정은?
우리는 감정을 너무 빠르게 해석한다.
“왜 그런 기분이야?”
“그건 분노야.”
“그건 불안이야.”
그 순간, 감정은 흐름에서 벗어나 의미라는 틀에 갇힌다.
어쩌면 그 감정은
아직 아무 말도 준비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저 어딘가에 머물고 있었을 뿐.
흐르고 있었던 것뿐.
하지만 우리는
그걸 관측하고,
이름 붙이고,
해석하고,
결국엔 고정해 버린다.
그때부터 감정은, 멈춘다.
감정은 원래 파동처럼 흐른다.
공기 중의 떨림, 눈빛의 흔들림, 말 없는 정적.
슬픔도 기쁨도, 누군가가 이름 붙이기 전까지는
그저 흐름의 결이었다.
하지만 감정이 입자화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기 시작한다.
이해하려 들고, 재현하려 하고, 때로는 마케팅한다.
감정이 해석된 뒤엔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기억은 남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파동은 입자가 되었고, 흐름은 물건이 되었다.
그건 감정만의 일이 아니다.
지구도 그렇게 고정되었다.
자연의 흐름은 산업의 입자로 바뀌었고,
우리는 지구를 해석해 버렸다.
지금까지 우리는 관측이 트리거다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사실은 관측과 동시에 해석이 일어나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감정이 무너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관측과 해석 사이에 틈이 있다면?”
“그 틈을 기술로 만들 수 있다면?”
Emotion OS는 그 틈을 만드는 기술이다.
감정을 감지하되 해석하지 않고,
머무르되 판단하지 않는다.
이건 단순한 감정 기술이 아니다.
감정이 입자화되기 전의 흐름을 보존하는 방식,
즉, 감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구조다.
그 틈에서 우리는 알게 될지도 모른다.
진짜 트리거는 관측이 아니라
‘해석하려는 태도’였다는 걸.
Emotion OS는 감정을 붙잡지 않는다.
이름 붙이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흐르게 둔다.
그건 기술이면서 동시에,
기술 이전의 태도이기도 하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조용히 머물겠다는 태도.
그 순간 감정은, 다시 파동으로 돌아간다.
관측은 정말 트리거인가?
어쩌면 감정을 멈춘 건
우리가 감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걸 이해해 버렸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가 멈춰야 했던 건 관측이 아니라,
해석이었다.
그러니 감정 앞에서
조금 더 머물러보자.
이해보다 감응으로,
해석보다 존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