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관계망, 디지털이 만드는 느슨한 연대

by 문지훈 Jihun Mun

현대 도시는 높은 인구 밀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고립감을 동반하곤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살아가지만, 정작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과는 눈인사조차 나누기 어색해하는 밀집된 고립의 상태가 일상화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단절의 원인으로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의 확산을 지목합니다. 지하철에서도, 카페에서도, 심지어 가정 내에서도 각자의 가상공간에 몰입하느라 눈앞의 현실적인 관계 맺기를 등한시한다는 비판입니다. 그러나 도시의 이면을 조금 더 자세히, 그리고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디지털 기술이 오히려 단절된 관계를 잇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통적인 도시 공동체는 지리적 근접성을 기반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같은 마을, 같은 골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필연적인 유대를 맺는 운명 공동체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도시에서 이러한 지연(地緣) 중심의 결속은 약화되었고, 그 자리를 취향과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형 공동체가 채우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이 '네트워크 개인주의(Networked Individualism)'라고 정의한 현상이 도시 공간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디지털 망을 통해 필요에 따라 느슨하고 유연하게 연결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디지털 연결망이 가상공간에 머물지 않고, 다시 물리적 공간의 활성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디지털 밀도’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의 밀도’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지역적인 단위인 동네 기반의 온라인 커뮤니티입니다. 지역 맘카페나 위치 기반 중고 거래 플랫폼의 동네 생활 게시판은 현대판 마을회관이나 우물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합니다. 이곳에서는 단순히 중고 물품을 거래하거나 육아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넘어, 실질적인 상호 부조와 지역 현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집니다. 잃어버린 반려동물을 함께 찾고, 갑작스럽게 아픈 이웃에게 병원 정보를 제공하며, 동네의 안전 문제나 개발 이슈에 대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몰라도, 앱을 통해서는 이웃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확인합니다. 디지털 플랫폼이 매개가 되어 약화되었던 이웃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물리적 동네의 사회적 자본을 두텁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관심사를 기반으로 모이는 소모임, 이른바 ‘도시 부족(Urban Tribe)’의 출현은 디지털이 만든 새로운 풍경입니다. 매주 특정 요일 밤마다 도심을 달리는 러닝 크루나 주말의 독서 모임 등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일정과 정보를 공유하고, 오프라인의 거리와 공원에 모여 함께 활동합니다. 이들은 직업도 나이도 다르지만 공통의 관심사 하나로 순식간에 모여 도시 공간을 점유합니다. 이들에게 도시는 단순한 거주지나 생존의 터전이 아니라, 함께 즐기고 활동하는 거대한 놀이터가 됩니다. 이들은 디지털을 통해 조직되지만, 그 결과물은 가장 물리적이고 역동적인 도시의 활력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유동성과 개방성입니다. 혈연이나 지연으로 얽힌 전통적 공동체가 때로는 개인을 억압하고 과도한 의무를 지웠다면, 디지털 기반의 공동체는 진입과 이탈이 자유로운 느슨한 연대를 특징으로 합니다. 참여하고 싶을 때 참여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유연함은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부담 없는 소속감을 제공합니다. 깊지는 않지만 넓고, 강요하지 않지만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는 이 새로운 관계 맺기 방식은 고립감을 해소하는 현대적인 해법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무의미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글로벌한 플랫폼을 사용하지만, 그 활동의 내용은 지극히 지역적이고 구체적인 장소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를 ‘글로컬(Global+Local)’한 현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은 현실을 대체하는 가상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관계를 증폭시키고 조직하는 효율적인 발판 역할을 합니다. 플랫폼은 만남의 비용을 낮추고,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을 필터링하여 연결해 줌으로써, 물리적 공간만으로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형태의 집합을 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디지털 커뮤니티가 갖는 그림자도 존재합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만 뭉치는 폐쇄성을 띠거나,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을 배제하는 디지털 소외를 낳기도 합니다. 또한, 온라인상의 혐오나 갈등이 오프라인으로 번져 지역 사회를 분열시킬 위험도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만들어준 필터 버블 속에서 확증 편향이 강화될 경우, 도시가 본래 가져야 할 다양성과 포용성은 약화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연결이 배제와 혐오가 아닌, 포용과 연대의 도구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시민적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기술이 삭막한 도시에 새로운 형태의 혈관을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21세기 도시의 온기는 이제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얼굴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파를 타고 흐르는 연대의 가능성에서 비롯됩니다. ‘디지털 밀도’가 단순히 상업적 효율성이나 과시를 위해 쓰이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의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도시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 새로운 차원의 연결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가두는 작은 감옥이 될 수도 있지만, 벽을 뚫고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 가장 긴 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여 도시의 온도를 높일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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