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이 움직일 수 없는 도시의 무게

by 문지훈 Jihun Mun

앞선 글에서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사무실의 담장을 허물고 업무 공간을 도시 전역으로 흩어지게 만드는 현상을 살펴보았습니다. 통신망만 연결되면 어디든 일터가 되는 세상은 마치 도시 전체가 가볍고 유연하게 변모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만 돌려 도시의 전체 지형을 조망해 보면, 이러한 흐름이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데이터가 아무리 빠르게 흘러도 결코 옮길 수 없는 무거운 설비와, 반드시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만 하는 현장들이 여전히 도시의 절반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기능이 특정 장소에 고정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는 다루는 대상의 ‘물리적 실체’에 있습니다. 정보나 지식은 네트워크를 타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과 에너지를 생산하는 시설은 그럴 수 없습니다. 디지털 경제의 최첨단으로 불리는 반도체나 바이오산업을 떠올려 봅시다. 이들은 고도로 디지털화된 공정을 거치지만, 그 기반에는 먼지 하나 없는 클린룸과 24시간 가동되는 정밀한 기계 설비가 필수적입니다. 이 거대한 설비들은 클라우드 서버 속에 존재할 수 없으며, 이를 운용하고 유지하는 엔지니어들은 기계가 위치한 물리적 현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이러한 첨단 제조 시설은 오히려 특정 거점에 더욱 거대하게 집적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직접적인 접촉’의 필요성입니다. 서비스의 생산과 소비가 분리될 수 없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어야만 가치가 발생하는 영역들입니다. 의료 서비스가 대표적입니다. 진단 데이터를 원격으로 분석하는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수술을 집도하고 응급 환자를 처치하며 입원 환자를 돌보는 행위는 의료진과 환자, 그리고 전문 의료 장비가 한 공간에 모여야만 성립합니다. 디지털 기술은 이 현장의 정밀도를 높여주는 도구일 뿐, 현장 자체를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고가의 첨단 장비와 데이터 시스템이 병원이라는 공간에 집중될수록, 사람들은 그 물리적 거점으로 더욱 강력하게 모여들게 됩니다.


세 번째는 도시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유지 관리’입니다. 도시는 저절로 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닦고 조이고 보수해야 하는 물리적 실체입니다. 전력망과 통신망을 관리하고, 거리를 청소하며, 화재를 진압하고, 지하철을 운행하는 일들은 모두 현장성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집에서 편안하게 사용하는 디지털 서비스들은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로를 달리고 시설을 점검하는 이들의 물리적 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에 가능합니다. 도시가 스마트시티로 진화하여 디지털 밀도가 높아질수록, 역설적으로 그 기반이 되는 물리적 인프라를 관리하는 현장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디지털 전환이 도시를 일방적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의 특성에 따라 공간을 재배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기능은 네트워크를 통해 널리 퍼져나가는 원심력을 갖지만, 물질과 신체, 그리고 인프라를 다루는 기능은 효율성을 위해 특정 거점에 더욱 단단하게 뭉치는 구심력을 갖습니다. 즉, 현대 도시는 가볍게 확산되는 영역과 무겁게 응축되는 영역이 공존하며 복잡한 층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의 도시 공간을 상상할 때 유연성과 분산만을 강조하는 것은 도시의 절반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재택근무자를 위한 공유 오피스나 쾌적한 주거 환경이 필요한 만큼이나, 매일 정해진 장소로 출근해야 하는 필수 인력들을 위한 안정적인 교통망과 접근성 또한 여전히 중요합니다. 산업 단지와 대형 병원, 물류 거점 주변의 인프라를 정비하는 것은 디지털 전환의 혜택이 특정 계층이나 직군에 머물지 않고 도시 전체의 기능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기술의 발전은 이 물리적 현장을 더욱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증강 현실 기술로 설비 점검의 효율을 높이거나, 인공지능으로 응급실의 환자 분류를 돕는 등 디지털 기술은 물리적 공간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결합하고 있습니다. 이는 디지털이 물리적 공간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 공간의 밀도를 더욱 알차고 효율적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연결'이 갖는 힘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도시는 가벼운 동시에 무겁습니다. 스크린 속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데이터의 흐름 아래에는, 땅 위에 단단히 발을 딛고 도시의 실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물리적 거점들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시를 입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흩어지는 사무실의 풍경뿐만 아니라, 여전히 땀 흘리고 움직이며 도시에 닻을 내리고 있는 이 견고한 현장들의 무게를 함께 가늠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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