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이면
장화가 신고 싶어
비를 기다렸다.
어릴 때 장화를 신고 걷는다는 건
빗물이 고여 있는 땅을 온전히 밟을 수 있는
아니, 발목 높이가 허용하는 곳까지
흙탕물이건 고랑이건 밟고 지나갈 수 있는,
하면 안 되는 게 허락된 기차게 재밌는 거였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면 힘껏 밟고 달려도 되고
아예 물웅덩이 한가운데 서서
한 번도 못 느껴본 정복자의 으스댐을 가져보기도 한다.
평소엔 얕은 물도 밟아선 안 된다.
물뿐만이 아니라 뭐라도 밟을라치면
바로 '쓰~읍'하는 무언으로 제지당한다.
'안돼'가 귓등에 걸쳐있는데도 늘 '안돼'로 시작하곤 하니
내게 장화는 허락된 약간의 숨통인 거다.
웬만한 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지금,
물론 장화 따위는 신을 필요가 없다.
철수와 영희가 슬기로운 생활을 대표하듯
어릴 적 추억의 노스탤지어로만 남겨져 있다.
뭔가 묵직하고 답답할 때마다 생각나는
그땐 그랬지 정도의 웃음만 담아둔 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확실히 그때보단 삭막하고 치열하다.
감성은 뭔가 더 옅어진 것만 같고,
이성은 뭔가 더 날 선 것만 같다.
그 당시 내 삶 속에도 지옥 같은 순간들이 분명 존재했겠지만
지옥이어도 재미난 지옥이었고 지금 보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코딱지를 파서 벽에 붙이는 것도 놀이가 됐으니,
치열하게 사는 요즘 들어 더욱
시시한 옛날 감성이 그립고 생각난다.
비밥.
추적추적 비가 내릴 때면
종종 멍 때리며 창밖을 내다보곤 한다.
그게 회사든 카페든 집이든 간에
감정의 뭔가를 털어내듯 빗소리에 빗방울에 시간을 흘려보낼 때가 있다.
그만 좀 치열하게 살아대라고 잠깐 고개라도 돌려보라고 말하듯
무척이나 감성 뭐 하게 가슴팍으로 치고 들어온다.
그럴 때면 일부러 끄집어낸 것도 아닌데
어릴 적 추억이며 감성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한다.
사십 중반이지만
아직 꺼내 볼 수 있는 재미난 기억도
손발 오그라드는 유치 뽕뽕인 추억도 제법 가지고 있고,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런 기억들이
작은 해방감이자 멍 때림의 주가 되고 있다.
요새 아이들에게 숨통은 어떤 걸까?
장화 따위는 1의 해방감도 줄 수 없다.
그 시절 아련한 놀이의 향수쯤은
어떤 답답함도 무게감도 덜어내지 못한다.
학원 한 번 빼는 걸로는 모자라서
학교를 하루 온전히 빠져야 조금의 숨통쯤 되려나?
어릴 적 눈병이 돌 때 안대를 돌려쓰는 요행은 귀여운 상상이 되어버렸다.
독감이니 뭐니 해서 누구 한 명 못 나오기라도 하면
그저 부러움의 대상으로까지 거론되곤 한다.
건강 따위는 후일로 미루고 보자는 게 아니라 그런 사유라도 없으면
분 단위로 돌아가는 숨 막히는 하루를 벗어나기 힘들어서다.
미련해 보이지만,웃프게도 미련을 갖는다.
아빠가 아닌 엄마였다면 사진이 어땠을까. 비밥.
아빠는 조금 귀찮다.
아니, 늘 걷던 방식으로 가고 있다.
아이들은 조금 신난다.
아예 작정하고 밟아 볼 기세다.
아빠도 어릴 땐 너희들 못지않았을 테지.
너희들은 커서 어느 길로 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