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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숨바꼭질.

가끔 떠올리는 기억

by 비밥

오늘도 술래는 나다.




늘 혼자 찾아 헤매는 기억 놀이지만 숨바꼭질 같아서 나름 나쁘지 않다. 기억 여기저기를 뛰어다녀야 하니 재미 따윈 내려놓고 마구잡이로 들쑤시는데 어째 가쁜 숨도 이렇다 할 좋은 기억도 갈수록 줄어만든다. 녹슬고 바랜 건지 꼭꼭 잘도 숨은 건지 가만히 떠올리는 건데도 은근히 죽을 맛이다.


추억에 맛이 있다면 단맛은 점점 줄어들 거다. 나이가 들수록 당 떨어짐은 잦고, 모순 같지만 편식 또한 잦아질 테니. 어린이나 하는 것쯤으로 여기지만 사실 입맛은 고집과 함께 늙어간다. 편식은 어른들 특권 같은 거다. 뭐라 할 사람도 별로 없고 편식쯤이 뭔 대수인가. 어찌 보면 추억도 기억 속 달달한 것들만 빼먹어서 안주거리가 늘 비슷할는지 모른다.


힘든 세상에서 엎어지려면 기억이라도 당 편향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짠맛, 쓴맛, 신맛 같은 기억들은 안개처럼 흐려져 가고, 결국 다른 맛들은 귀찮아서가 아니라 잊혀 가서 희미해진다. 추억을 떠올리다 보면 좋았던 기억들이 먼저 떠오르는 건 그래서일 테지. 물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겪어보니 아닌 경우도 많고 뭐 그렇기도 하고 왔다 갔다가 너무 잦지만, 나 역시 기억은 단것이 먼저고 풍선껌처럼 달달하게 씹고 불다 잠시잠깐 붙여놓곤 하니깐.


기억 속에 숨어버리면 있던 일도 없던 일 같다. '그때 그랬었나?...'쯤으로 끝나버리기 일쑤지만 그래서 찾는 재미가 더해질 때도 있다. 다만, 무딘 기억 때문에 숨바꼭질 때마다 타짜 고광렬을 자꾸 소환하게 된다.

" 가만있어 보자.. "



구식 텔레비전은 지금이나 그때나 달달한 기억이다.




어떤 이유가 됐든 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 같지만, 세상사를 다 보여주고도 바보상자 취급을 받았으니 녀석 입장에선 심드렁했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매번 두드리고 패도 온전한 채널은 잘 뱉어내지 못했나 싶기도 하고.


채널 손잡이를 돌려봐야 잡히는 건 2,3개. 딱히 어린이가 볼 만한 방송은 없다. 운 좋게 공청 채널이 잡히면 우주 괴물이 나오는 어설픈 SF를 접하기도 하지만, 평소엔 정규 방송 전 나오던 흑색도 백색도 아닌 최면 같은 화면에만 눈을 홀려야 했다. 슬쩍 부딪히거나 안테나의 각도에 따라 묘하게 선명도가 꿀렁거릴 때면 예민하다는 표현은 우리 집 텔레비전만 갖는 고유 감정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화면 조정 시간이 되고서야 알록달록 색이 뜨고 동해물과 백두산을 불러댄다. 누가 바보상자라 욕하는가. 설렘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단어다. 눈 나빠진다고 떨어지라 하지 마라. 진정한 명당은 텔레비전 코 앞이고 배산임수에 tv가 빠진 건 시대적 안타까움이다.


지금을 살고 있는 난 문득 순간순간이 힘들고, 어떤 한 무더기는 풀리지도 않게 슬프고, 좋았던 기억인지도 모를 어떤 것들은 어디 깊게도 빠져버렸는데. 단칸방, 다락방, tv하나, 밥상 하나. 어째 그것들은 아직도 여전하고 무슨 좋은 기억이라고 희미하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건지.


작은 칭찬이 못마땅하고 큰 가난이 거추장스럽고. 그땐 늘 쓰린 하루라서 작고 큰 것들이 귀찮고 싫고. 가난하고 구차한 지금 따위는 득달같이 가버리라 애원하고. 바람과는 달리 참 더디고 평범하게 흘러가고. 나쁜 것만 움켜쥔 건 아니었는지 가끔 그리워서 돌아도 보고. 쓰다고 뱉어내도 바득바득 주워 담아지고. 그런데 뭔지 모를 고마움도 느껴지고.


그새 커버린 내가 삼킬 수 있는 기억이라곤 포화 끝 어디 작은 귀퉁이쯤이라 여겼는데, 귀퉁이를 돌아서니 거미줄 같던 어릴 적 골목길이 다시금 새어 나오고. tv 앞 어린 나는 여전하고. 어쩌면 아직 그때를 벗어나지 못한 철없는 어른이로 커버린 건 아닐까. 슬픈 추억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 어떤 의미에선 그저 한심한 사람. 딱 그 정도인 사람 정도로 큰 건 아닐까.


소음 같던 기억 속 뒷골목은 아무리 귀를 대도 고요함만 울려대고, 정신없이 뛰어다닌 집앞길은 사진 속의 기억들만 간신히 움직이는. 이제는 사진에 의지해도 매번 맞나 싶은 의구심에 기억도 쫒기가 힘에 부치니. 괜스레 하루에 힘든 것들을 잊으려 짠맛, 쓴맛도 죄다 단 걸로 왜곡해 덮어버린 건지 모르겠다.


비밥.



3평 방 안. 구식 tv 하나, 장롱 하나, 옷장 하나, 허름한 냉장고, 좁은 다락방.




추억 속 마가린 간장 밥은 늘 달콤하다. 매번 간장이 더 들어가 짭짤했지만 그때만큼 맛난 밥은 드물다. 모락모락 뽀글뽀글한 작은 밥상과 옹기종기 속닥속닥 하던 작은 방. 좋고 나쁜 기억이 교차되지만 추억은 꼭꼭 잘도 숨어버린 곳.


숨을 곳도 찾는 곳도 거기서 거기인 늘 짐작 가는 곳에 숨어도 늘 심장이 조여오던 놀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 꾹 감고 더듬거리며 웃던 곳. 이제는 억지로 긁어모아야 작은 얘기 하나가 완성되는 희미한 먼 곳으로 가버린 곳.


그래도 어린 시절 단칸방은 써도 삼키는 기억에 포함된다. 사방이 막힌 숨바꼭질에도 아직 술래가 찾을 게 남아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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