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노력하는 척'

by 비밥

난 쓸데없는 고민만 한 포대여서 사람마저 쓸모없는 포대자루 같아 보인다. 고민의 성향상 드러내지 않으면 삭히게 되는데, 그럼 설익은 채로 드러내는 게 좋을까?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것도 고민으로 둔갑하기에 머뭇거리다 곰삭는 경우가 우세하리라 본다.




고민이 한가득인 나는 포장 밖으로 삐져나온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처리하길 원해왔고 잘 들어준다는 이유만으로 적절한 대상자에게 무료 나눔을 실천해 왔다. 들어주는 것만으로 그것은 내 것에서 달아났다. 꽤 잘 먹혀 왔고 틈틈이 때를 노려왔다. 내 것임에도 이동성이 있다는 건 어떤 경우에선 쾌재가 되어 준다. 감정 소모의 어떤 것이라면 더욱이.


적정 대상자는 대개 아내였으며 어이없는 표정 앞에서 잔망스러운 고민 상담을 늘어왔다. 아내를 힘들게 해 왔던 건 항상 다르다 생각한 여전히 비슷한 고민들을 주절거렸기 때문. 삼킨 줄 알았던 걸 이내 곱씹게 된 까닭이다.


털어놓자면 마흔 중반인 나는 그간 여러 일을 접해 왔지만 아직도 적성 운운하며 방황의 제스처를 보이고 있어 아내로 하여금 쉬지 않고 씹을 건더기를 선사했다. 순수하게 미안함을 건네지 못하는 것은 어이없게도 아직 철이 덜 들었다는 고민까지 떠넘기고 있기 때문. 더 이상 무료 나눔이 되지 않는 이 고민은 유료 나눔의 선상에서도 취급되지 않고 있다. 지랄의 영역에서 겉돌고 있어 애당초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여기서 슬슬 꺼내드는 게 '노력하는 척'이다.


시작이 반 이라기에 나는 '알아들은 척'이라는 오판을 끌어들여 '괜찮은 척' 시작만 하고 끝내는 멍청함을 펼쳐 보였고, 그것은 '두루섭렵한 척'이라는 미치고도 팔짝 뛸 착각을 안전하게 안착시켜 버렸다. 공부를 하다 만 것도, 그림을 배우다 만 것도, 그리고 장사에 집중하다 만 것도..


이미 포기는 취미와 같은 습관이 되어있었고 난 그 습관을 '노력하는 척'이라는 기괴한 발현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퇴원 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긋난 인간관계를 남 탓으로 돌려세웠다.

관계 회복의 의지를 깔끔히 지워버렸다.

애쓰지 않고 미련 없이 도망쳤다.

그리고, 그 어떤 포부도 새로운 각오도 삶의 전환 같은 것도 없이

회사를 관뒀다.


항상 미안함을 안고 있는 동생의 제안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호시탐탐 장사의 신을 노리던 동생은 총명한 두뇌로 얻어낸 안정된 대기업을 제끼고 더 안정된 사업으로 제기에 성공해 있었다. 요식업에 안착했고 잘 나가는 두 개 지점의 어엿한 대표가 돼 있었다. 오며 가며 넌지시 건넨 사업 제안에 직장 생활을 일하는 척 흘려버렸던 나는 관심 없는 척 하나씩 캐묻다 시기적절한 척 장사길로 들어섰다.


항상 갖고 있는 미안함과 여전히 느끼는 질투로 인해 고마우면서도 뭔가 싫었지만 도망이란 대안에 복수정답 따윈 없었다. 약의 부작용이 내심 걸렸을 뿐. (당시 집중력 저하, 손떨림, 말 더듬 등의 부작용이 있었다) 달력은 이미 찢어버렸고 지나간 시간보단 다가올 날을 체크해야 했다. 혼자 저지를 자신이 없어 형님께 도움을 청했고 다행히 긍정의 답을 보내주셨다. 겁쟁이는 전쟁의 승패보다 아군의 보강이 중요하니까.


장사는 처음.. 아니, '척'하며 살아와서 시작하는 모든 것은 전부 처음이었다. 얼떨결에 출발했으니 시작점을 정해야 했는데 아는 척, 잘난 척만 해온 겁 많은 나완 달리 아내의 추진력은 굉장했다. 아파트 상권에 접근성은 좋았지만 죽어있던 코너자리를 단숨에 계약했고, 인테리어며 재료 준비 등으로 한 달가량을 보낸 후 긴장할 새도 없이 첫 손님을 맞게 됐다. 예상보다 반응은 좋았고 첫날 재료소진을 시작으로 연일 북새통을 이어가더니 운 좋게도 대박집이 돼버렸다. 내 인생에 무운은 속속들이 뜯겨 나가 운칠기삼의 입 바랜 기운도 없거늘. 아내를 비롯한 형님 내외와 가족들이 대단한 기세를 몰고 온 것처럼 느껴졌다. 쩌면, 내 기력도 조금쯤은..


건강 등에 신경 쓸 여력도 없이 잠만 자고 일하는 생활이 반복됐지만, 빽빽한 일상은 오히려 자잘한 생각을 지워갔다. 내겐 좋은 영향이다. 몸이 고되면 생각도 무뎌지니. 어쨌든 가게는 연일 호황이었으며 죽어있던 주변 상권에 활력을 주기 시작했고 나는 대박집 사장님이 되어있었다.


대가리보단 몸을 굴려서인지 그즈음에 내 모습이 아마도 가장 가림 없는 진짜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또 즈음.. 늘 그렇듯 나란 작자의 병적인 척 놀이가 은근슬쩍 주사위를 굴리기 시작했고, 반복된 일상의 매너리즘과 지루함 속에서 결핍된 관심을 찾게 만들었다. 결핍에 기초한 내게 그것을 채우는 최상은 '척' 놀이였기에 '노력하는 척'을 시작으로 재미를 찾아대기 시작한 거다. 없는 눈치가 그 재미를 더 우습게 만들어 가면서.


보통은 이 경우 만족보다는 기분 좋은 욕심에 매진하게 된다. 자본주의 아닌가. 숫자가 높아질수록 사소한 불만은 없어진다. 아니, 어느 정도의 불만쯤은 타협 없이 뭉개질 수도 있다. 방심한 건지 원래 답이 없는 건지 재발은 생각보다 빨랐다. 나란 인간의 종특이다. 이게 글로 게워내도 끝없이 토하게 된다. '불만'은 노력 빠진 내가 꺼내드는 점진적인 시비의 꼬투리였다.


없는 불만을 만들고자 한다면 나를 찾으면 된다. 불만 없는 척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다 드러내면 좋을 텐데 아닌 척 불편함을 내비쳤고, 아내의 어이없는 한숨 앞에 온갖 재미없는데도 우스운 관심 유발을 쏟아냈다.


"지금도 문제없지만, 이건 왜 이러면 안 되는 거냐"

"내가 우스운 건 알지만 정말로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너무 힘들게 일하는 게 보이지만, 힘든 척 노력하는 척하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냐"


그냥 틀려먹었다. 이러면 대화가 안 된다. 아니, 시작도 안된다. 서로를 독려해도 모자랄 시간을 나 좀 봐달라고 투덜거리면 안 된다. 열심인걸 알아봐 달라 꼬장 부려도 안된다. 어릴 때부터 결핍된 칭찬에 생떼 써서는 더 안된다. 장사란 게 그렇다. 바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힘들고 내 몸 내 걱정보단 내 가게를 건사해야 한다. 그 안에서 시끄럽게 구는 건 말 그대로 시끄러운 것 밖에 되지 않는 거다.




낯부끄러운 내 꼬장은 더 나아가 관계를 고장내고 있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진실의 지속성이 짧은 나는 그간 무수히 많은 주변인을 이탈시켜 왔다. 시작마저 가짜는 아니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매번 멀쩡한 허우대를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짧은 관계를 맺고 끊어왔다. 내게 있어 신뢰의 유일한 동아줄인 가족 또한 다를 바 없었으며, 미련하고 어긋난 관심유발로 마지막 밧줄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동생은 동업을 반대했다. 사업에 있어 동업이란 실금이 가 있는 유리를 잘 맞추어 끼워둔, 언젠간 드러날 수 있고 드러나지 않아도 불안한 상태라는 것. 나는 부정했다. 표면적으로 가족운영을 표방한 동업관계였으나 갈등 따윈 없었다. 동업에서 감정과 돈의 다툼처럼 보이는 이율배반적 무너짐이 사실은 '돈 때문이다'는 명제를 드러낸다고는 하나 내 경우 전혀 아니었으니까. 당시 무지할 만큼 돈에 욕심이 없었고 백수인 지금까지도 숫자에 절실하지 않은 한심함을 유지하는 걸 보면.


물론, 나로 인한 관계의 틀어짐은 후일 급물살 보단 폭포수 같은 낙차 폭으로 삽시간에 멀어지는 거리감을 만들게 된다.


중요한 건 다들 착한 사람이라는 거다. 없는 것들을 있는 척하며 지내와서인지 착하지 않은 나는 착한 사람들을 병적으로 좋아한다. 그리고 나로 인해 섞일 수 없는 감정 대립이 당연하게 발생해 왔다. 이 경우 땀 흘리며 노력하는 착한 이들과 섞일 수 없는 건 '노력하는 척'하는 나. 그나마 착한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나쁜'에 가까운 나뿐이다. 어느 정도 지금의 자리에서 목표가 달성될 때면 온갖 핑계로 시비를 불러내 그냥 노력하는 척 일관해버렸고. 이유 있는 척 사소한 트집으로 토를 달던 억지 불만은 당연히 당연한 척으로 둔갑해 있었다. 내 타고난 못난 기질이 이 모든 걸 쏟아버리는데 한몫했으리라 여겨지지만, 어쨌든 스스로 관계를 걷어차고 가게를 걷어차버렸다.


언제나 시작은 반짝였고 끝은 허무했다. 아니, 어쩌면 시작마저 번지르르했을지도. 이것이 내가 가진 종특이라면 그 빌어먹을 것들을 몸 한구석으로 몰아놓고 도마뱀처럼 잘라내고 싶지만, 의지박약의 결속으로 유행처럼 돌고 돌아 대가리든 다리든 결국 재생될 게 분명하다. 생각해 보면 난 칭찬에 집착한 유약한 게으름뱅이였다는 걸 알게 된다. 똑똑한 동생에 대한 질투도, 군생활의 성과에 대한 삐딱함도, 성공한 가게의 주역이라는 관심도 어찌 보면 칭찬에 목마른 엇나간 행동이 가져다준 유약한 반복이었다. 미움을 사게 되고 밉상으로 살게 되는 불필요한 반복.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 이건 '' 때문이 아닌 그냥 내가 '' 같은 놈이어서일까? 사실 누구나 '척'하는 것 몇 개쯤은 쓰며 살아간다. 그게 귀여운 요행이든 꼴 보기 싫은 이상함이든 필요가 있기에 쓸모도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이 상황을 피하고 나를 가림과 동시에 상황에 접근하고 나를 드러내는 양단의 모습을 다 갖추어서다. 그럼에 필요에 의해서 적당히들 꺼내 쓴다. 나처럼 무작정 꺼내 들고 휘두르지 않는다. 그럼 이게 그냥 내 기질 탓인 걸까? 아니면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일까?


철들고 싶다는 철없는 고민을 철들지 않은 내가 풀 수 있을까?...


'노력하는 척'하는 내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