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봤을 때 꺼내 볼 기억들이 현저히 부족한 건 '척'하며 거짓으로만 급급하게 버텨 온 인생의 버팀목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버팀목이라 착각했을지 모른다. 잘나지 않은 내가 잘난 척해왔던 건 무엇으로부터 버티기 위해서였을까. 과시보단 관심에 관심보단 관종에 가까웠을 것이다.
관종의 이름으로 가져다 쓴 '척'들이 너무 많다. 잘난 척, 있는 척, 술 잘 마시는 척, 재능 있는 척, 인기 있는 척, 멋있는 척, 말 잘하는 척, 공부 잘하는 척, 잘생긴 척, 능력 있는 척...
하나같이 거부감 들고 껄끄러운 것들을 그간 잘도 써먹으며 위장해 왔다. 진실 같은 거짓의 진짜 위장.
이때 저 때 필요악으로 사용해 왔으니 관종이니 글러먹은 놈이니 중요한 건 아닐지 모르겠다. 이런 연유로 탓하다 보면 갈리는 이유 따윈 의미 없어 보인다. 그냥 내가 그런 놈 이려니 원색적인 자책만 하게 돼버리니까. 그래도 반성의 날을 세웠으니 뭐라도 이유를 갈라내고 싶다. 그게 관종 때문이었다면 그 정도 분류는 수긍이 될 것도 같다.
관종을 부추기는 세상이다. 각종 플랫폼에 떠밀려 내몰리는 것 같아도 보람도 주고 즐거움도 주며 성취감에다 잘하면 돈까지 준다. 누구 하나 관심을 마다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관심이 싫을 수도 있다. 그럼에 공평하게 선택이란 걸 쥐고 필요에 따라 나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세상이다. 알고리즘으로 그 관심을 묶고 기억마저 묶어버릴 수 있다.
관종으로 살아온 것 같지만 내 기억의 알고리즘엔 묶을 게 남아있지 않다. 진실 같은 거짓의 머무름이 삽시간을 넘지 않아 간신히 연명하기 위해선 쉬지 않고 '척'하며 살아가야 한다. 터지고 사라져도 머물고 있는 것처럼 비눗방울 같은 짧은 지속성을 계속 불어대야 한다. 이제와 기억의 가난함을 논하는 건 '척'하며 거짓을 공유시켰던 그간의 사람들에게 너무 죄스럽다. 나는 진짜인 친구로 동료로 남편으로 아빠로 존재했다 말할 수 있을까.
부끄럽게도 온전한 역할 수행을 거론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얻지 못할 치장으로 위장한 채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잡히지 않은 알량한 뭐라도 있지 않을까 뒤져본들 혼자 곱씹는 시간마저 미련하게만 느껴진다. 이것은 재능으로 치부되지 않는 요행 같은 것이기에 뭐 하나 건진 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건질 게 있다. 척해서 득 될 게 있을까 싶지만 얻는 것, 잃는 것 두 가지씩이나 가져갈 수 있다.
얻는 건 알량한 자기만족이고 잃는 건 그 나머지다. 자기만족은 허상이며 그 나머지는 현실이다. 재밌는 건 잃는 것들이 삶에 주를 이루지만 '척'하는 자는 얻는 게 삶에 전부일 수 있다. 고작 자기만족이라 따진다면 그것의 중독 전임을 감사해야 한다. 늪과도 같고 고양이 발바닥과도 같은 그것은 내 정신을 홀리고 내 발을 옭아매어 착각의 안위를 선사한다. 이 달콤함은 넘볼 수 없는 충분조건이기에 그 외 필요조건은 맛을 희석시켜 거부감이 곧 잘 생겨난다. 자기만족에 눌어붙으면 여타 만족은 청약을 불허한다. 자기만족은 내 집의 편안함에 벙커의 견고함까지 덧 댄 비교 불가의 철옹성이고 모두를 만족시키지 않아도 되는 자애로운 개인주의다.
이기주의도 아닌데 남발하는 게 어때서..?..
문제는 '척'해서 걸러내는 자기만족의 정제물에 있다.
어쨌든 대상을 속이는 것이다. 피해의 정도가 미약하다 여기는 건 스스로에 국한된 자기만족적 불감증이며 상대와 나 모두 거슬려 보이는 보풀 같은 찌꺼기를 서로의 기억에 남길지도 모른다. 되돌아봤을 때 흐뭇한 기억은 진실한 순간뿐이었고 당연하게도 난 그런 기억에 목마를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길을 걸으면 생각 나는 아련하고도 좋은 기억이 부럽고도 부러운 지금. 그나마 '척' 해온 삶을 반성하게 된 계기가 사사로운 일상의 미소였다는 것이 고맙고도 한심할 따름이다.
'척'하며 살다 보면 밥 먹듯이 하게 되는 게 있다. '거짓말'
끊임없이 반복되고, 끊을 수 없이양질인 거짓들.
물론, 대다수는 식전빵쯤에서 거부감을 갖게 되지만, 난 오랜 시행착오 끝에 보란 듯이 디저트까지 잘 챙겨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돌아봐야 할 요지는 이것이다. 거짓말. 그것도 '작정'하고 내뱉은 숱한 거짓말. 그것의 밀도는 한없이 빽빽하나 채우면 채울수록 나는 비어있게 되며, 그것의 굳은살은 두껍고도 깊어 양심으로 찔러대도 꿈틀거림은 바랄 수도 없다.
어느 정도 '척'하는 것이 사회에 통용되고 언제든 뿌릴 수 있게 누구나 소량의 '척'들을 쥐고 살아가지만 나처럼 별스럽게 '척'하며 살아가는 걸 글러먹은 놈에 두고 반성해 보자는 접근은 아니었다. 방점은 나를 싸잡고 있는 자잘하면서도 굵직한 거짓말. 결국 '척'하며 얻어 온 자기만족은 순간의 허영적 쾌감이 아닌 영속의 마약적 중독인 '거짓말'이며, 불행하게도 이것 역시 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동생과 같은 똘똘함을 보이기 위해선 공부하는 척을 시작으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거짓말이 필요했고, 인기 있는 대학 생활을 위해선 잘난 척을 시작으로 그간에 있지도 않은 이성교류를 들먹여야 했으며, 탈 없는 군생활을 위해선 군기든 척을 시작으로 나이를 비롯한 각종 편차를 위장해야 했다. 능력도 없는 내가 사회에서 연명하려 주절거린 각종 거짓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거짓말을 떼지 못하는 건 '척'하는 자기만족의 순간보다 '거짓'으로 지속할 수 있는 회피가 더 오래가기 때문이다. '척'으로 간 보며 살아온 내가 그 자극적인 맛을 거부하진 못한다. 중독이란 게 이런 거다. 뒤늦게 후회해도 이미 나는 갉아먹고 없어진 존재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서 나란 존재에서 하나 둘 떠나가게 되는, 신비로운 모순에담긴 신기한 맛을 체험할수 있게 된다.
하나의 '척'은 하나의 '진실함'을 뺏어간다. 노력하는 척, 잘난 척, 바쁜 척은 노력해서 잘날 수 있는 바쁠지도 모를 나를 미리 강탈한다. 아니, 떠민 것도 아니니 날아가 버렸다 함이 적확하겠다. 잠깐의 허영적 쾌감을 둥둥 띄우기 위해 그나마 붙잡고 있던 실낱같던 기회를 스스로 날리고 있는 거다. 결국, 웃기고 자빠진 주제에 놀고 앉아있게 된다.
아차 하는 순간은 습관적인 실수만을 연속하게 하고 실수를 망각하는 마약적인 사고만을 키우게 한다. 점보다 작아진 소멸을 확인하면 익숙한 듯 또 다른 '척'을 찾아댄다. 끊임없이 반복하다 현실을 깨닫게 될 때쯤 내 앞에 놓인 건 '할 수 있는 척' 하나다. 궤멸적 습관으로 나를 지워오다 결국 볼품없는 의지박약의 '할 수 있는 척'뿐. 척하면 척했던 나는 뭐 하나 척척 할 수 없는 칙칙한 내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척은 하나의 나를 뺏어갈 뿐이지만 하나의 '거짓말'은 '지워야 할 새로운 나'를 만들어낸다. 결국 지우다가 나란 존재는 사라진다. 그리고 상실을 뒤집어 실상을 내게 안겨준다. 무서운 외로움. 이 외로움은 자초한 것이기에 나를 더욱 고립시킨다. 내 안에 나를 고립시키는 것은 무서운 밀치기다. 낭떠러지의 고통보단 무인도의 무음 같다.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소리쳐도 울림은 겉돌고 반복은 피할 수 없다.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무음의 중얼거림만 윙윙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