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놀이를 종종 해오던 나는 숫자도 나만의 색을 입혀 3은 빨강, 5는 노랑, 7은 하늘색이었고 감정에도 색을 입혀 우울은 회색, 당황은 파랑, 발랄은 초록 등으로 구분 짓곤 했다. 더러는 인간관계에서도 그놈, 그 새끼, 그 X발 새끼로 나누어 칠하는 호쾌한 색놀이를 이어갔다.
문득, 한 번도 '척'에 색을 입히지 않았음을 발견하곤 번뜩이는 척 색을 입혀봤다. 슬픈 척은 하늘색, 힘든 척은 파란색, 괴로운 척은 짙은 파란색, 죽은 척은 피멍색...
너무 쳐진다. 밝은 색으로 가서. 잘난 척은 노란색, 있는 척은 연두색, 센 척은 주황색, 순수한 척은 하얀색....
그럼,
가장 빛나는 '황금색'은..?..
난 '척'놀이 와중에 빛나고도 구린 '주인공' 놀이를 결코 빼먹지 않았으며, '주인공인 척' 어깃장을 늘어놓아 모든 이의 미간을 아름답게 주름잡아버렸다.
잘난 것 하나 없던 나는 '잘난 척'을 좌청룡 '가진 척'을 우백호로 연신 '주인공인 척' 인생의 쌩드라마를 집필해 왔다. 참으로 구리고도 역겨운 게 '똥' 같고도 '황금색' 같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삶의 본질은 나 일 수 있으나,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삶의 이치 안에서 모두와 함께 하고 있다. 본시 아우르는 세상이고 모두가 주인공이기에 내가 죽으면 세상도 사라지는 게 아닌 세상과 여타 주인공들은 존재하고 나만 뒈지는 거다. 자타포용적 세상에서 자기중심적 세상을 살아왔으니 똥색이어도 할 말은 없다. 황금색으로 잘못 본 척해서 기분 좋은 척하기도 싫다.
내가 표출하는 '척'에 애틋함이 심어지면 결국 병으로 자라난다. 눈치라는 잡기로 보듬어 키울 수도 있다. 진짜라는 망각이 내 안에 '척'들에게 금사빠 하게 되는 속고 속이는 병. 나를 사기 치기 시작하면 사기가 충만해 남을 후려칠 수 있을 것 같지만 똥을 먹어봐야 아나. 나 빼고 다 안다. 결국 똥이 되고 멀어지기 전에 먼저 피하고 만다.
'척'하는 인생에 멀어지는 것 따윈 없다. 주저 없이 피해 날아가고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건 녹지 않는 차가운 편견뿐이다. 본능으로 살아가는 동물들도 가끔 '척'을 한다. '죽은 척'. 동물이야 생존을 위해 죽은 척을 한다지만 생존이 걸린 사안도 아닌 나는 죽은 척 똥을 자처해 버렸다.
끝내주는 냄새만 끝장나게 풍기면서.
내 색은 '온기 품은 황금색'이고 '적당히 피해 갈 놈' 쯤으로 분류해야 할런지도..
내게 입혀진 편견의 색을 고스란히 벗을 수 있다면 빨가벗고 지내는 거야 별스럽지 않다. 바꾸기 위한 노력 따위는 아랑곳도 않으면서 고깝게 보는 시선만 불편해하는 것. 결국, 그것이 내가 나에게 덮는 편견의 누더기란 것을 여태 무시해 왔고 벗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주인공 탈을 써왔다는 편견 역시.
'매트릭스'를 보고 난 후 한 번씩 허황된 공상을 한다. 이 세계는 정말 매트릭스 안 세상이지 않을까? 그래서 한 번쯤은 정신 차릴 만도 한데 프로그래밍된 채로 X같이 쭉 사는 건 아닐까? '척'하며 살라고 설계된 채로 말이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이보다 더 상황이 나빠진데도 허탈한 해탈웃음으로 유의미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