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동에도 아침은 온다지만, 약 기운이 풀리는 말짱한 아침이면 늘 약에 휩쓸려 사라지는 기억 없는 밤이더 기다려졌다.
결혼 전 결혼을 위한 전제조건은 '밥숟가락'이었다. 입에 풀칠할 거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 당시 프리랜서 작가를 관두고 동종 업계 이력을 여기저기 넣던 시기였으므로 깔끔한 무직이었다. 아직 어렸고 패기가 넘쳤지만 장모님께서 내건 조건은 콩깍지가 씐 능력도 없던 내겐 발등에 불이었다. 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든 억지 부탁으로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 낙하산 취업을 하게 됐다. 어설픈 작가경력을 살려 어설프게도 알지 못하는 홍보를주 업무로.
문제는 발등에 있는 불인데.. 원치도 않은 일을 급하게 하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고 그 불은 아직 잘도 타고 있었다. 원치 않는 밥숟가락..
아닌 척, 괜찮은 척 적성은 상관도 없이 작정하고 일만 한 것 같다. 남의 눈초리. 낙하산이라는 힐끔거림. 보이지 않는 편 가르기와 수군거리며나누는 판가름. 없는 능력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 정도 순조로웠고 연차가 쌓여갔다. 동시에 발등 역시 순조롭게 곪아갔다. 내 경우 적성은 의지를 밀어냈다.
알 수 없는 스트레스가 꾹꾹 밀려 들어왔지만 밥 숟가락을 들었으니 뭐라도 퍼 먹어야 했다. 아니 뭐라도 퍼 먹여야 했다. 나보단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한다 생각했다. 빈손에서 든 숟가락이니 눈 감고 휘저어도상관없다고 여겼다. 그저 숟가락질만 멈추지 않으면 된 거라고. 손까지 곪아서야 숟가락질이 문제란 걸 알게 됐다. 그간 좋은 척 관계를 유지해 온 좋지 않은 사람들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치장하고자 한 그간의 '척'들과는 다르게 좋은 척, 안정된 척 덮어 온 관계가 터진거다.
내 탓인지 남 탓인지 모르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날의 연속이었다. 마음은 복잡했고 정신은 흐릿했다. 집중인지 뭔지도 모를 멀뚱거림의 계속이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던 기억의 모든 소리는 동굴 안 울림처럼 머릿속을 맴돌고, 시선은 고정할 수도 없이 고장 나 있었다. 그리곤 정확히 어느 날인지 언제쯤 인지도 모르게 정신병동을 경험하게 됐다.
솔직히 이런 이유로 이런 곳에 입원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살며 가장 의미 없이 먹고 자고 가장 말없이 대화했던 한 달을 경험했다. 존재 자체가 고통으로 묶여 있었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마음의 숨통을 옭아매고 있었다.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이 온전히 보듬어 주기엔 확실히 위태로운 경계였다. 경험이라는 표현을 결코 권하진 않지만 누군가는 겪을 수 있는 일이며, 적어도 난 긍정의 결말을 얻어왔기에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엄연한 병원이고 상처를 치유한다. 그럼에도 그 경험은 득실이 뚜렷한 무게를 남겨 어깨를 누르는 영구적인 겉옷을 씌워준다.
병원 생활은 두려움 반 불안함 반으로 흘러갔다. 나 빼곤 이상한 자들이니 경계해야 한다는 눈빛들로 모두 무장한 채. 입원 당시 지워진 기억만 빼면 정신은 말짱했지만 한편으론 아닌 것도 같았기에 의심의 질문들은 매 순간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했다.
하지만 난 미친 것도, 미친 척할 필요도 없었다. 내 생각엔 그저 밝은 상태가 아니었을 뿐이니까. 물론, 여기 있는 모두 나와 같은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는눈치였다.
며칠이 흐르고 약의 농담이 익숙해져서야 미치지 않았다 자신한 나는 이곳 사람들이 하지 않는 걸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복도 한편 마치 커다란 한 권의 책처럼 빽빽이 꼽혀 있는 책장이 떠올랐다. 아무도 손대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 책장. 왼쪽 맨 위칸에서 쭉 편 손 한 뼘만큼을 뽑아냈다.
'우선 이만큼만'하고 뽑은 거다. 그리고 '우선 이만큼만'의 책은 곧 경솔한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한 시간은 억겁이고 하루는 영겁이었다. 약 기운에 진정되길 바랐으나 아침 처방은 각성인 듯싶었다.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나 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 좋아하는 척해야 했다. 힐끔거리는 시선들을 눈치 봐야 했다. 미치지 않았음을 드러내야 했다. 한 달가량을 줄곧 읽고 퇴원할 즈음 담당의가 “안 쉬고 그렇게 읽는 것도 환자분껜 좋지 않아요”라고 얘기해 주기 전까진 몰랐다. '척'하며 의식한 게 나뿐이라는 걸. 어느 누구 일언반구 없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저 여기서까지 '척'하는 내가 조금 한심하고 우스울 따름.
필력, 독력이 없는 자의 주력은 '척력'이다. 읽은 척, 들어본 척, 아는 척 등등. 정말이지 얕은 소양의 갖은 척들로 척척 치고 빠져나와야 모종의 무리에 무리 없이 포함될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교양은 탑보단 도미노와 같아서 위태로움이 곱절이다. 형체 또한 넓고 다채롭지 못해 달랑 한 줄의 기대감 떨어지는 로또의 모양이며 자칫 허무하게 날릴 수 있다. 툭 건드리기도 시원찮은데 꼴에 잘 세웠노라 애지중지한다.
어쨌든 나는 필력도 독력도 없었기에 가독력이 좋은 책이라고 읽힐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다듬어진 문장들을 쑤셔 넣는 것 만으로 채치고 걸러지는 유형의 온전함을 받아내는 것 같았다. 부스러기 같기도 먼지 같기도 했지만 내겐 또렷한 형체의 무엇이었다. 해답이라곤 없어 보이는 공간에서 한 움큼의 약만이 시간을 나누고 정신을 나누었거늘 책의 공간이 따로 생겨버렸다. 그것은 '손님을 맞는 사랑방' 같으면서 '쉼을 자처하는 별채' 같았다. 기억을 묻어버리는 밤에 기대던 내가, 하루를 말짱히 시작하는 아침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탈출에 성공해 외마디 비명도 없이 뛰어내리는 사람. 하루 온종일 비명을 지르는 사람. TV에서나 보던 꽃 꽂은 아주머니. 오늘 역시 난동을 부리는 아저씨. 어찌 보면 상식의 답은 기대할 수도 없고 나 또한 겉으론 무심한 척 속으론 하악질을 해댈 만큼 평범함이 삭제된 곳에서 그건 분명 숨통이었다. 평범함으로 위장하기 위함인지 평범해지기 위한 치장인지 아쉬운 인지감이 들었지만 내겐 도피처였고 따질 여유는 없었다.
약 기운이 사라져 가면 다시 한 움큼의 약이 들어오기 전까지 한 움큼의 책을 집어넣어야 했다. 그래야 기계적이면서도 슬픈 지루함에서 벗어나 부산하면서도 동시에 무섭게 고요한 공간을 그나마 흘려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이곳은 너무 조용했다. 생각마저 멈춘 것처럼. 그래서 더 집착했을지 모른다. 책을 통해 얻었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는 어쩌면 억지로 구겨 넣은 정보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조용함을 깨고 싶었다. 아니, 누구라도 깨주길 바랐다. 이왕이면 재밌게 깨주길.
누군가 내 슬리퍼에 오줌을 싸질렀다. 화장실 여기저기엔 꼼꼼히도 똥칠을 해놨다. 아침에 그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에 가서야 둘 다를 알게 됐고 간호사 옆에서 얼버무리는 내 옆자리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눌하긴 했지만 평소 형님 같은 이미지에 말 한번 건네지 못한 걸 미안해하던 찰나였다. 덤덤한 의료진들. 흔한 일인 걸까? 오줌에 날아간 황망한 슬리퍼와 황금색으로 도배된 화장실의 잔상이 하루종일 울렁거렸다. 대다수는 태연했고 나만 망연했다.
더 황당한 건 의사가 따져 물은 연유에 횡설수설한 옆자리 환자는 몇 알의 처방약만 받았으나 난리통 후 심정물음에 죽고 싶다 말한 나는 진정제 한방에 억울한 꿈나라를 가게 됐다. 뭔가 불공평했지만 금세 진정되었다. 처지 한탄이지만 죽고 싶다는 말을 몇 차례 한 것과 입원 당시 내 위험수치가 부단히 높았겠거니 자위하다가도 똥오줌이라는 매개체에서 분노의 한계점이 무너지고 있었다. 토막난 입원 당시의 기억과 삭히지 못한 그날의 날카로운 인상에서 어쩌면 유연한 처방이었지 않나 가늠해 보는 정도로 마무리 지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에선 똥에 얽힌 사건들이 심심찮게 발생해 왔고 형님 같다 생각한 그 환자는 예상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할아버지뻘이었다. 평소에 정신없이 웃고 돌아다녀서 아저씨 정도의 활력을 가늠했다. 사람이 살짝 붕 떠 있으면 보기보다 어려 보인다. 그래도 눈살 찌푸리는 별스런 일 하나로 예민한 긴장감이 조금 무뎌졌다. 있어보니, 이곳에선 뭐라도 비극적 사건사고보다 희극적 한바탕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묵음보다 소음이 그나마 대화를 이끌고 여기선 그 별스런 대화가 무용 같은 유용이 되어준다.
사실 우리는 외로움이나 괴로움의 속성들이 희극적 요소로 풀리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보다 과장된 개그적 풀이의 진정과 보다 추락된 비극적 몰이의 지양을 바라고 그 중간 어디쯤 삶의 헛웃음 같은 희극적 발현을 넌지시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깔끔하게 맞춰진 콩트가 아닌 '불쑥 뿜어낸 애드립'같은 것 말이다. 내 경우 가족이 풀어주길 바라지만 난 항상 의도는 깊은 곳에 꼬아 던져두고 답지 따윈 지워버리는 치밀한 함정을 만들곤 했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나도 모르게 풀려야 할 때가 있다.
겪어보니 정신병은 암과 같았다. 내 경우 스트레스가 주원인이었고 마음에서 시작해 신체 여기저기로 전이됐다. 바르게 보지 못하는 눈을 갖게 되고 의도와 다른 말을 하게 되며 올곧게 듣지 못하게 됐다. 때때로 기억조차 없는 시간들을 의미 없는 걸음만이 함께 하고 도무지 안 풀리는 잡념들은 더욱 엉키게 꼬아만 대는. 맘 속에 자라나서 여기저기 퍼져 가는 암이지 않았을까..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선 그간 무시하며 키워 온 '척'들을 조금이나마 척결해야만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쌓아 온 흔하디 흔한 스트레스라는 이름을 지워야 했다. 해서 모두가 피하고 싶은 그 공간에서 나를 피하지 않고 받아내야 했다. 삶에 복귀해 또다시 갖은 '척'들을 복기할지언정 여기선 멈추고 싶었다. 남들은 하지도 않을 것 같은 이 하찮은 고민이 내게 주된 고민이 된 건 정말이지 재미없이 혀를 차기에 충분했다.
퇴원과 동시에 뜯어먹기 좋게 포장된 과자 같은 약을 박스채 받게 됐다. 약을 잔뜩 받았다는 건 치료가 잔뜩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했다. 이 사실에 대한 우울감을 치료할 약까지 필요했다. 목구멍이 작아 한 번에 털어 넣지도 못할 것들을 과자처럼 씹어 넘겨야 하는데도 아이러니하게 위안 같은 쓰다듬이 다시 스며들었다. 외통수처럼 눈을 부라려도 충고만 일삼는 세상에서 잘못된 판이니 다시 시작하라는 절실한 훈수 같았다.
약의 개수만큼 처지가 한탄스러웠지만 약의 개수로 나를 지탄하기는 싫었다. 나를 치유하기 위함이다. 자꾸만 손이 가는 과자처럼 희망의 의지를 깡으로 씹어 넘겼다. 꽤 짭짤한 효과도 제법 물리는 결과도 있었지만 기대의 포만감은 조금씩 차는 듯했다. 고작 약 따위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니 병약한 고통 따위에서 나를 벗어내기 시작했다. 괜찮은 척 별거 아닌 척 키워 온 암 같은 존재가 뿌리째 뽑혀 완치되어 갔다. 의심 없이 나로서만 생활해 오며 '척'해오던 습관도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완치라는 착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재발의 추적이 항상 뒤 따른다. 정신과 마음의 온전함도 척과 척의 끈질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