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술(음악, 미술, 연극 등) 활동을 함에 있어서 정부 지원금 없이는 정말 하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라 많이들 이야기한다. 예술가들은 여기에 의존해 창작활동을 한다는 의미이다. 과거부터 예술가는 후원자가 존재해야지만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영화 <왕의 츰>(2001)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해당 영화는 프랑스 루이 14세 궁정 음악가 릴리의 이야기로, 릴리는 철저하게 루이 14세의 왕권과 유희를 위해 활동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반대로 작곡가 베토벤은 스스로 자기 작품 세계를 시민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것을 기반으로 스스로 자기만의 예술 활동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도 이런 인물들이 다양한 분야에 존재하지만, 지금의 우리 상황에 있어서는 대다수 예술가들의 후원자는 정부라 할 수 있다.
대게 예술가들은 후원자(혹은 자기 작품에 값을 지불하는 특정인)의 니즈에 맞춰 예술을 활동을 하기 때문에,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런데 정부가 후원자가 되면서 그 평가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말은 행정 절차상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작품성, 제작 과정, 그 밖에 향유자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정부 지원금만 수령하고, 치열한 작품 창작에 매진하지 않는다는 상황이 많아 진 것. 이미 작품에 대한 값은 지불되었고 후원자는 더 이상 거기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정부가 후원자를 자처하지만 예술가에게 자율성을 주기 위함이라는 당위성이 좋아 보일지는 몰라도, 그런 자율성은 일부 사례에 해당 되며, 정부기금은 전체 예술 생태계에서는 정말 ‘필요악’처럼 느껴진다.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예술 활동을 하지 않는 예술가가 대부분이며, 자기 작품 활동의 주도성을 잃고 처럴한 작품성으로 경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아이러니하게 예술가를 복지의 대상으로 여기고 또 다른 방식으로 나라에서 먹여 살려주려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경기도는 예술인에게 기회 소득을 주려는, 이는 예술인들이 경제적으로 취약계층이라는 것을 모든 사회가 인정하는 것이다. 다양한 직군에 있어서 왜 예술인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는지, 사실 나는 약간의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래서, 더 나은 예술환경을 위해서는 예술창작 지원금이 자신의 예술 활동에 있어서 여러 트랙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원금이 선정되면 하고, 떨어지면 안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술 활동을 함에 있어 그저 하나의 옵션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체가 된다면 그 예술 활동의 생명력을 짧을 수밖에 없으며, 사회에서 기대하는 예술의 역할이나 그 시너지에 대한 기대는 점차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예술가라면 자기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 구축을 위한 노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자세와 환경이 필요하다. 차라리 부업을 하는 게 더 나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의 핵심은 예술가들의 계속 자기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순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정부 지원금은 그러한 순환을 예술가 스스로가 막아버리는 것을 주의하자는 것이다.
2025. 3.14
** [글-콘]은 뮨지션의 ‘음악 글쓰기‘ 프로젝트로 ‘콘서트’라는 음악 고유의 활동을 ‘글’로써 시도해 보고자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는 음악의 다양한 의미와 그 가치를 쉬운 언어로 소통하고자 기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