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서 “예술을 직업으로 한다”고 말하면, 상대방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대단한 일을 하시네요”라는 약간은 감탄 섞인 말, 또 하나는 “그걸로 먹고는 살 만한가요?”라는 현실적인 물음이다. 가끔 존경의 눈빛을 받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술가는 현실에서 한 발 떠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묻고 싶다. 경제적 가치로는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여겨지면서도, 왜 예술가는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는가? 극단적인 예이지만,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이 예술가를 가장 먼저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만 봐도, 예술가라는 존재 자체가 지닌 본질적 가치가 분명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예술을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창작의 소재가 고갈됐거나, 잠시 멈추고 있거나, 아니면 이어갈 자신이 없거나. 생계의 문제는 핑계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창작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예술가적 사고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 사고의 실현은 눈에 보이는 작품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것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자기 삶을 어떻게 사유하고, 그 사유가 어떻게 투영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작품이든, 삶의 방식이든 말이다.
그래서, 예술가의 삶은 창작 그 자체다. 어떤 방식이든 자신만의 예술을 표현하고, 그것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과정. 바로 그 작업의 순환이 예술가의 삶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는 단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그 결과물을 통해 드러나는 고유한 관점과 기술, 감수성을 가진 존재다. 예컨대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쇼팽과 거의 흡사한 연주로 전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기술의 재현이 아닌, 감정의 구현을 통해, 그는 자신만의 언어로 음악을 전했다.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한때는 어떻게든 ‘예술만 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썼고, 그 해답으로 떠오른 것이 ‘국가지원사업’이었다. 지금은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라 각 지역의 문화재단이 예술가를 지원하는 체계가 잘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제 많은 예술가들이 ‘지원금 없이는 창작하지 않는’ 현실에 놓였다. “내 돈 들여선 창작 안 해”라는 말은 일종의 현실이 되었다. 이는 예술가들이 후원자 없이는 활동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오랜 현실을 반영한다. 과거의 후원자가 귀족이나 부자였다면, 오늘날 후원자는 ‘정부’인 셈이다. 물론 이는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원금 없이는 창작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구조적 종속도 야기한다. 비약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장에서 체감되는 ‘정부 지원금의 위력’은 예술가들의 창작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프 고인스는 『예술가는 절대로 굶어 죽지 않는다』(2017)에서 예술이 얼마나 시장경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술은 순수한 영역이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믿음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예술가의 임무는 단지 창작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창작물을 어떻게 타인과 공유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해 소유하게 만들고 또 사회 속에 위치시키는 — 이 전 과정 또한 예술가의 몫이다.
결국 ‘예술하기’는 치열한 창작의 연속이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내적 치열함,
그리고 불특정 다수를 향유자로 만드는 외적 치열함.
그래서 더 고달프다.
그래서 더 애잔프다.
그런데도,
나는 창작이 늘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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