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中) 여행

2박 3일의 피렌체 여행 1편

by 머쓱

한국을 떠나 로마에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여행 중이다. 물론 로마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떠나와서 돌아갈 곳이 있는 상태를 여행 중이라고 한다면, 아마 평생 여행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여행 중에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인들의 휴가 성수기인 7월, 8월, 그리고 9월 초의 추석 연휴까지 끝나고 나니 스케줄이 여유로워져서 2박 3일로 피렌체에 다녀올 수 있었다. 스물한 살에 홀로 유럽 여행을 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니, 5년 만의 피렌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기억나는 장소가 있을까, 여러 감상이 뒤섞인 채로 새벽 6시 30분 출발하는 기차에 올랐다. 자리에 앉은 순간, 이 여행을 이렇게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서 순간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2019.09.20 AM6:20

로마 떼르미니 역에서 기차를 타고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으로 간다. 한 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는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것과 같은 시간인데, 기분은 그렇지 않다. 4월에 로마에 와서 다른 도시로 홀로 '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이다.


승강장에 서 있지만 움직이지는 않는 기차에 타 있으니, 이륙하기 전에 비행기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로마로 떠나오던 그날, 4월이 시작하던 날에 비행기에 앉아서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더라... 아마 소정이를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탄 비행기가 갑자기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충돌사고가 난다면? 혹은 외계 생물체와의 접촉으로 인해 다른 세계로 가게 된다면? 다른 세계로 가든, 죽든, 어쨌든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평생을 바라 온 대로 내 인생이 소설 같아지겠지만, 소정이가 참 슬퍼하겠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좌석에 앉아 있지만, 출발은 하지 않은 이 시간.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이 시간이 여행을 결정하기 전에 내가 가장 기대했던 순간이다. 하지만 막상 이 순간에 물밀듯 몰려오는 감정은 후회다. 무엇이 그렇게 후회되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결정을 후회하며 이제 출발하려 몸을 떠는 기차를 붙잡고 싶어 진다.


2박 3일 동안 피렌체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어떤 잠을 잘까. 과연 잘 수 있을까.


아,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2019.09.20 AM9:16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서 산 마르코 수도원에 왔다. 산 마르코 성당 옆에 부속 건물로 있는 박물관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보러 왔지만, 막상 오니 그림보다 공간 자체가 놀랍다. 작은 기도실들이 줄 지어 있는 고요한 복도에서 나를 포함해서 세 명 남짓한 관람객들은 발소리를 낮춘다. 주요한 방들을 지키는 경비원들은 서로 아침 인사를 나누거나 어제 못 다 읽은 책을 읽고 있다. 사보나 롤라의 기도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명의 경비원들은 내가 들어가니 말소리를 낮춘다. 그곳을 지나 공공도서관으로 간다. 코시모 메디치가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하며 최초의 공공도서관이 된 곳이다. 이 곳의 경비원은 12개의 장은 족히 될 것 같은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데, 거의 마지막 장에 온 것 같다. 혹은 참고 문헌 부분만 남겨 놓은 가장 뿌듯한 순간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들어오 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던 가을 아침의 햇살조차도 이 공간에서는 숨죽이고 있다. 무언가를 믿는 마음은 아름답다. 오직 프레스코 벽화 하나만 장식되어 있는 작은 기도실에서 홀로 기도하는 사람을 상상해본다. 그 믿음이 쌓여서 이 공간을 만든 것이다. 공간의 분위기는 나를 작게 만든다. 하지만 초라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숭고함이 이런 것일까? 경외감일까. 일상에서 쓸 일이 없던 단어들,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던 단어들을 이해하게 된다.


이곳에서 추상적인 시간을 감각으로 느낀다. 오랜 시간과 마음이 켜켜이 쌓여서 생긴 것이 닿아서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수도원을 나올 때에는 궁금해진다. 이들은 흘러서 어디로 갔을까. 나는 어디로 흐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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