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린다 메이/하재연
5월에는 벨린다를 만날 테야
내 이름을 묻지 않을 거야
웃지 않고도 살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을까
편지함에 새들을 키우고
나무 인형에다 물을 줄 거야
(중략)
새로 만들어진 노래는
재봉틀로 하나씩 흘러들어 가지
벨린다랑 5월만 있을 거야
2월에 휴가를 갑니다. 외국에서 가이드로 있으니 휴가는 한국으로 갑니다. 기간은 한 달입니다. 한 달 동안 비자를 받고,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돌아옵니다. '휴가가 한 달이다'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직업에 따라 휴가는 다르게 주어질 것입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의 사회 초년생들이라면,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것이고 마음대로 연차나 월차를 조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한 달이라는 휴가가 길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여행 가이드는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연휴가 없습니다. 그때가 관광 사업에서는 성수기이니까요. 그래서 사실 일 년에 한 달은 그리 긴 것은 아닙니다.
이번 휴가가 저에게는 로마에 와서 첫 귀국입니다. 휴가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가 됩니다. 이제는 ‘한국’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두근거릴 정도입니다. 시의 화자는 5월에는 벨린다를 만날 거라며 그때를 상상합니다.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편지함에 새들을 키우고, 나무 인형에 물을 주는 일 따위를 합니다. 이름 같은 것은 아무도 묻지 않을 겁니다. 웃지 않고도 살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곳에서는 매일 일을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자기소개를 합니다. 손님들은 당연히 처음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손님들뿐만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올해 봄에 로마에 온 저에게는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가 처음 보는 사람들입니다. 웃지 않고는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게 생각해주었으면 해서 눈을 휘게 웃고 맞장구를 칩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잘 통하거나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이 있다면 친해집니다. 자꾸만 마음이 엇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멀어집니다. 그렇게 제 자리를 만들어가며 적응을 해왔습니다. 그동안 내내 웃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닌데, 당연한 것인데,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에 온 지 9개월이 지났습니다. 10년, 20년을 있었던 사람들에 비해서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이사할 필요가 없는 나의 집도 생겼고, 사람 관계에서도 솔직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늘 앞에서 웃음 짓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조금 편해졌습니다.
이렇게 로마에 잘 물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휴가가 가까워지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자꾸 들뜹니다. 마치 여름에 봉숭아 물을 들여놓았던 것이 빠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한여름에 봉숭아 꽃을 따다 으깬 후에 손톱에 발라 놓으면 물이 들어서 손톱이 붉은빛이 됩니다. 그 봉숭아 물 손톱을 겨울에 첫눈 올 때까지 유지하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나요? 저는 어릴 적에 그 말을 믿어서 여름 방학이 끝나갈 때쯤 일부러 봉숭아 물을 들였습니다. 최대한 늦게 빠지게요. 하지만 아무리 늦은 여름에 물을 들인다고 해도 첫눈이 올 때까지 그 손톱이 버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름방학과 첫눈 사이에는 한 학기라는 시간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봉숭아 물이 빠지는 걸 보고 있으면 아쉽습니다. 발을 동동거리게 됩니다. 물은 조금만 늦게 빠졌으면, 첫눈은 조금만 더 빨리 내렸으면…
지금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자꾸 뭔가 물이 빠지고 있는 것 같아요. 로마에 적응했던 느낌이 다 거짓말 같습니다. 사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는 로마로 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걱정도 있어요. 너무나 편안한 한국에서, 다시 이 험난한 곳으로 오고 싶을까요? 로마에 가까스로 익숙해졌는데, 이 익숙함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빨리 떠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2월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을 때마다 2월을 상상합니다.
2월의 주말에는 시인 친구 소정을 만날 겁니다. 웨인 티보의 아이스크림 그림을 나누어서 타투를 새기고, 모던한 분위기의 흰 테이블이 있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실 겁니다. 저는 아메리카노를, 소정은 카페 라떼를 마시겠죠. 평일에는 집에서 언니와 시간을 보낼 겁니다. 2월 20일에 영화 <작은 아씨들>이 개봉을 한다고 해서,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로마에 와서 한번도 극장에 영화를 본 적이 없거든요. 이탈리아에서는 외국 영화에는 자막보다 더빙을 많이 합니다. 이탈리아어를 잘하지 못하면 영화를 보기 어려워요. 영화관과 영화관 팝콘을 사랑하는 저에게는 가혹한 환경입니다. 영화관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밀크티를 마실 겁니다. 좋아하던 것을 못하게 된 기분을 아실 겁니다. 외국에 살면 흔하게 느낄 수 있죠. 음식을 포함해서 생활 습관이 달라집니다. 꼭 외국에 살지 않아도 거주지를 옮긴 경험이 있다면 공감할 겁니다. 즐겨 가던 장소에 가지 못하게 되고, 좋아하던 길을 걷지 못하게 되는 것, 그리고 가깝던 사람을 보기가 어려워지는 것. 각오를 하고 떠나온 것이지만 생각보다 더 쓸쓸한 일입니다. 밤과 아침에는 제 방에서 머피를 끌어안을 겁니다. 머피는 강아지입니다. 스무 살에 제가 데려왔지만, 돌봐 준 것은 제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언니가 데리고 있습니다. 사실 ‘휴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존재입니다. 제가 없는 1년이, 머피에게는 삶의 7분의 1이었으니까요. 이 역시 수십 번 각오했지만, 슬픈 일입니다. 머피의 털을 쓰다듬으며 그의 생애에 조금 더 함께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그들과는 2월만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