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엽서/ 김경미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 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중략)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 시집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 1989)
여운이 길게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두 번 만난 것뿐인데 기억 속에서 자꾸 되풀이되고, 나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관계를 발전시키게 되는 사람이요. 그렇다고 그 사람과 실제로 연락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나의 그리움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상상 속의 인물은 절대 나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도 않고, 비참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예전에 여럿이서 함께 모인 자리에서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었어요. 그것만으로도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사람이 쓴 시를 읽어봤는데, 좋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사랑에 관한 시를 쓰고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입니다. 따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주 적은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그 사람이 작은 책방을 열었다는 소식을 여러 사람을 건너 건너서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저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끔 그 사람을 몰래 꺼내 봅니다. 상처 받을 불안함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랑입니다.
로마에 와서 데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두 번 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데이트’라고 하는 것의 기준은 다르겠지요. 하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밥을 먹고 손을 잡으면 데이트라고 정하겠습니다. 첫 번째 데이트의 상대는 여행객이었습니다. 저녁때 (당연하게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나서 파스타와 고기를 먹으며 와인을 곁들이고, 집에 가는 길에 떼베레 강을 보면서 손을 잡는 그런 정석적인 데이트였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여행객이고, 저는 로마에 사는 가이드이니 관계의 발전 여부는 그 이후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저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연락이 뜨문뜨문 이어지고는 있지만 가망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러 중국 음식점에 갔다면 달라졌을까요?
두 번째 데이트는 로마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지인, 그러니까 이탈리아 사람이요. 음,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저는 첫 만남에 소극적인 편인데 말이죠. 손을 잡을 때 축축한 느낌이 먼저 들었습니다. 꾹 참았습니다. 그런데 키스를 할 때에 혀도 습기가 가득했습니다. 그 눅눅한 혀에 얼마 전 집 누수 문제로 제 방에 핀 곰팡이가 떠올라 버렸습니다. 소름이 돋더군요. ‘당신이 곰팡이의 화신이지!’라고 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저 몸을 멀리 뺐습니다. 왜 그러냐는 듯 저를 바라보는 상대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집에 가야겠어. 일이 아주 바쁘거든.” 하고 돌아왔습니다. 당시는 가장 한가한 11월이었어요. 이후에 예의상 미안하다고 연락을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상처 받지 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난리통에도 사랑은 있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사랑은 넘쳐흐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연애’를 말한다면, 신기하게도 어느 시점부터 제 삶에는 연애의 긴장감이 사라졌습니다. 관계가 발전할 여지가 있는 상황이 더 이상 달갑지 않습니다. 스물네 살까지는 열심히 연애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성인 친구를 만나서 친해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우리 한번 만나 볼래?” 같은 말로 시작하는 지극히 ‘정상 범주’ 안에 드는 연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섭식장애와 우울증을 겪으며 뚝 끊겼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앞에서 순응적이고 애교가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칫 잘해주면 미래의 헌신적인 어머니가 될 인재로 보일까 봐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멈췄습니다. 이렇게 제가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니 그런 연애는 할 수 없게 되었나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가끔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만남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네가 아직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그래.”라는 말을 듣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런데 데이트를 할 때 저는 자꾸 제가 아니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하면, “그럼 너는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것의 줄임말) 구나. 좀 친해지다가 만나.”라고 합니다. 도대체 아예 만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요?
예전에는 연애를 오랫동안 하지 않는다면 ‘내가 매력이 없는 사람인가?’라고 생각하며 침울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연애 여부는 그 사람의 매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멋있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연애를 할 생각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혼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옛날 방식이네요.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김하나와 황선우의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은 40대의 두 작가가 조립식 가족을 이루어서 함께 사는 일상을 다룬 에세이입니다. 굳이 40대라고 말을 붙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는 것을 기대하는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혼자인 것은 아닙니다. 이들처럼 결혼하지 않고도 혼자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20대 중반의 청춘이 연애하지 않는다고 혼자인 것은 아닙니다. 이들에게 ‘결혼’이라는 단어가 저에게는 ‘연애’로 대체되었을 뿐입니다.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 힘을 다해 나의 삶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건 아주 지치는 일입니다. 결점이 너무나 많이 보이기 때문에 노력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때로는 상상하는 겁니다. 시를 쓰던 그 사람, 지금은 작은 책방을 열었다는 그 사람과 머릿속에서 사랑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도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몰래 기억 속에서 꺼내 보고 사랑해주기를.
오랜만에 사랑 이야기를 했더니 쑥스러워요.
그래도 용기 내어 고백하자면, 이 글을 읽어주는 분들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