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초대장
Res Artis Conference 2024 — TAIPEI
Interweave the Spectrum: Beyond Collaboration
MoCA Taipei와 협업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지난 4월의 어느 날, 나의 소중한 동료이자 친구 Hshin Yi가 보낸 이메일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꺅!"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편지는 미술관 협업 일정으로 대만을 방문한 내가 시간을 쪼개서 자신이 근무하는 레지던시에 와준 내게 감사하다는 말과, 공간을 보여줄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는.. 내가 짐작할 수 있을 내용으로 시작됐다. 이내 바뀌는 문단에서,
"Lizzy, 우리는 너를 멋진 Artist라고 생각해. Res Artis Conference의 Facilitator로 너를 정식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우리가 제안하는 비용들과 일정을 확인해 보고 와 줬으면 좋겠어. 혹시 네 일정이 있다면, 우리가 공식 서류를 꾸려줄 수 있으니 필요한 부분들은 언제든 편하게 제안해 줘. 우린 너를 다시 만났으면 해 "
너무나도 근사하고, 신나는 제안이었다. 예술가라면 한 번쯤, 해외 레지던시를 검색하기 위해 사용해 본 적이 있을 Res Artis에서 매해 진행하는 컨퍼런스에 퍼실레이터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회를 제안받는다는 건 내겐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몇 달 전, 유럽의 레지던시들을 검색하다 이내 창을 닫아버렸던 이유는 예술 교육가로 오랜 시간을 보내온 내게 시각 예술가로서 나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작업들을 담은 포트폴리오가 그 당시엔 없었기에 레지던시에 참여한다는 건 조금은 현실적이지 않은 일 같았다.
돌아와서_ 나는 그녀에게 이메일을 바로 보내지 않고, 메신저를 통해 이메일을 잘 읽었으며 일정들을 확인하려고 한다는 메시지를 재빠르게 남겼다. 이메일은 공식 소통 창구이기에, 친구로서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기엔 참조인들이 많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를 추천했을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온전히 그리고 당장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몇 분 뒤, 그녀는 답장을 통해 그녀 또한 정제된 글들을 담아 이메일을 쓰느라 혼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여러 번 지웠다 써낸 그녀의 메시지는 초청에 응해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혹여나 내게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염려하는 그녀의 마음 쓺을 내가 모를 리 없다. 나는 미리 잡혀있었던 한국에서의 수업들을 모두 취소하고 그녀의 제안에 응했다.
꽤 오랜 고민 끝에, 예술가로서 그리고 예술 교육가로서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Balance : As an Artist and Teaching Artist>를 구상하고, 컨퍼런스 준비를 마쳤다.
9월 첫 주의 대만은 3월 말의 대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무척 무더웠다. 바람 한점 없는 길 위에서 쨍한 햇빛을 마주하며 눈을 찡그리고 뻘뻘 땀을 흘리며 길을 걷기 바쁜 대만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스르륵 이 도시에 젖어들었다. 호텔 체크인을 빠르게 끝내고, 나의 동료인 시니가 미리 주문해 둔 비트를 구매하기 위해 재래시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문 닫기 10분 전에, 조금은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컨퍼런스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비트를 구할 수 있었다.
빨간 무, 비트를 사용한 워크숍을 진행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모두가 신기해했다. 이 재료로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들은 내게 궁금해했다. 자연스럽게, 요즘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나의 프로젝트인 <Pigments Lab : Colors from nature> https://mununa.notion.site/Pigments-Lab-Colors-from-nature-2024-2025-17fbf34b89078018a547d076c9324d4d?pvs=4 이야기로 연결됐다.
그들은 한참 내 작업과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듣더니, 그들의 레지던시에서 작업해 보면 무척 좋을 프로젝트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정말 나를 초청해 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었기에 무척 재미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이야기들을 기분 좋게 듣고 또 흘려 넘겨냈다.
Res Artis Conference에서 나는 자전적이고, 정체성이 드러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꽤 많은 참여자들이 내 세션에 참석해 주었다. 컨퍼런스의 오전은 기조연설로 진행이 되고, 오후는 세션이 3개로 나뉘어서 동시간에 3개의 워크숍이 3개의 떨어진 공간에서 진행되는 형태였다. 사전 신청을 통한 참석자 명단은 미리 가지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언제든 바꿀 수 있었기에 워크숍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전체 인원을 가늠하는 것이 조금은 어려웠다. 내 워크숍은 40여 명 정도가 신청을 해 둔 상태였고, 디렉터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가장 많은 예약자를 받은 아티스트라며 그 인기를 즐기라고 말했다. 그리고선, 공간을 확장해서 세팅을 해 둘 것을 모든 스태프들에게 요청했다. 게다가 나의 워크숍이 진행되던 날은, 바람이 강하게 불고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야외 공간을 우리의 야외 전시장으로 사용해 보려던 나의 계획은 수정이 필요했다. 공간 안에 긴 줄을 연결하는 연출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최대한 기획했던 방향을 챙겨낼 수 있게 도움을 준 스태프들의 애쓰는 모습을 보며 아쉬워하던 내 마음은 이내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그래, 변수에 대해 너무 애써서 내가 믿는 완벽한 방법으로 바꾸려 하지 말자. 이미 다양한 참여자들의 참석만으로도, 이 공간 속 분위기는 완벽하잖아?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든 예술가들과 큐레이터, 기획자들이 나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앉아 내 슬라이드와 나를 바라본다. 그들의 눈빛에서 궁금증이 가득했고, 에너지가 느껴졌다. 씩, 나는 웃으며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국제 컨퍼런스지만, 나는 이런 자리에서는 내 모국어인 한국어로 항상 나의 인사와 소개를 하곤 한다. 그들이 이해를 하든, 못하든 그것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기도 한 나의 모국어로 건네는 인사는, 이미 정체성에 대해 설득이 가능한 강한 힘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컨퍼런스가 끝난 이후, 첫인사를 한국어로 건넨 나에게 따뜻한 피드백들이 쏟아졌고 몇몇은 자신이 초청받는 어떤 자리들에서 시도해 보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짧은 컨퍼런스 속 전달하고 싶었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어떤 순간에서도 우리는 모두 균형을 잡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지만 잘 잡는 방법은 사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라 믿는 나는, 우리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두가 갖고 있는 각자의 예술 언어로 이 균형감을 자신만의 속도로, 온도로, 무게감으로 잡아내고 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나 자신을 잃지 말길 _
*Res Artis Conference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