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통찰이 이토록 절묘할 수 있나
[이세린 가이드], 김정연
김정연 작가의 첫 작품 [혼자를 기르는 법]을 너무나 재밌게 본 나는, 원래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며 갖다주기까지 하지 않는데, 후배에게 읽어보라며 전해주기까지 했다.
그런 김정연 작가가 신작 [이세린 가이드]를 냈다는 소식을 알라딘에서 보자마자 냉큼 구매했다.
늘 그렇듯 바쁜 일상에 책 들춰볼 엄두도 안나는 지경에 이르다가 한창 바쁘던 몇 개월 전 장기 출장 중에 숙소에서 절반을 읽었고 얼마전 나머지를 다 읽었다.
역시나 김정연 작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통찰이 반짝이는 사람인 듯 하여 놀랍다. 그냥 음식 이야기가 아닌 음식 모형 제작자 이세린이라는 인물을 탄생시켜, 음식, 음식 모형, 삶, 현시대를 살아가는 30대 여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아우른다.
김정연 작가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만화 속 주인공이 마치 김정연 작가 자신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만화 속 인물이 너무나 생생하고 실존 인물 같다. 2등신에 가까운 둥글둥글한 캐릭터인데도, 직업의 디테일, 그 인물이 가진 생각의 깊이, 곳곳에 도사린 촌철살인 같은 사회나 삶에 대한 시선이 또 한편으론 너무나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날카롭지만 한편으론 쿨하고 깔끔해서, 정말 이시대를 살아가는 실존 인물 같다는 느낌을 준다.
디오라마 관련 일을 하다 자기 사업장을 차려 음식 모형 제작자로 살고 있는 인물 이세린. (이런 서사 디테일도 좋다.)
지인 중에 디오라마 작가도 있고, 크고 작은 모형들을 만드는 걸 볼 일이 간혹 있었던 나로서는 나름 가깝게 느껴지는 분야라 더 재미있었다.
어릴 때 만화나 백과사전을 보면 너무 재밌었던 게, 저런 어떤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풍부하고 섬세한 그림으로 묘사해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만화도 오랜만에 어릴 적 백과사전이나 만화책을 읽던 기분을 선사했다. 음식인 것처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음식이 아닌 재료들.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내가 하는 일, 프로덕션 디자인-드라마 미술 분야는 역시 어떻게 하면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들 수 있을까 애쓰는 분야다. 야외를 극 중 상황에 맞게 진짜처럼 세팅한다거나, 세트를 진짜 극 중 장소인 것처럼 디자인하는데 중점을 둔다.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로운 것은 아닌, 수많은 레퍼런스를 참고해서 ‘있을 법한’ 공간을 만든다. 현실에는 없는 새로운 공간이지만, 또 어딘가 가면 저런 공간이 있음직한 그런 공간을 만드는 절묘한 재미가 있다.
만화 속 이세린은 주문 의뢰를 받아 개인 작업실에서 혼자 작업을 한다. 누군가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 협업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홀로 판단하고 홀로 씩씩하게 작업을 한다. 그의 이야기는 모두 그의 공상, 회상, 상상,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일 자체는 실제 있는 무언가를 ‘베끼는’ 작업이지만, 그 영역 안에서 얼마간의 창의성을 발휘한다. 혼자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하나의 완성품을 만든다. 머리도 쓰고 몸도 쓰는 노동이 필요하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통해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매번 새롭게 다른 작업을 하기에 흥미롭다. 자기가 조절해서 자기 스케쥴을 정하고, 근무 시간을 정해서 일하지만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하지만 주말에는 모든 연락 창구를 꺼 놓고 충분히 쉰다. 이거야 말로 요즘 20-30대가 원하는 삶 아닐까.
나는 하루 일과가 정확히 똑 떨어지는 일을 하고 있지 않기에 일이 곧 삶이지만, 그래서 어릴 때는 일과 내 삶이 분리되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기에 어릴 때 생각도 많이 났다. 한편으론 이세린의 직업인 음식 모형 제작자를 보며 오히려 내 직업, 드라마 미술을 하며 느꼈던 즐거움, 장점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 난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거나 장기 프로젝트는 내 성향에 안맞는다고 느껴서, 매번 새로운 작품을 할 수 있는 이 일을 재미있다고 여겼었지.’ ‘늘 24시간 일의 연속이고 언제 연락이 올 지 모르지만, 그래도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지.’ ‘내가 만든 결과물이 즉각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었지.’ 이제 일 한지 10년 차, 지쳤다면 지쳤고,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면 꿈꾸고, 익숙해진 것들이 몇 생겨 견고해져 가는 그런 시점에, [이세린 가이드]를 보며 새롭게 다시 깨닫는다. ‘맞아, 나 이 일이 좋아서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지.’ 하지만 이세린의 일을 대하는 저 태도 또한 좋다. 무모하게 열정 넘치지는 않지만 일은 즐거워 하며 한다. 그간의 노하우에 열의를 더해 결국 해내고야 만다. 하지만 주말은 깔끔하게 연락을 끊고 휴식을 취한다. 저것이야말로 내가 나아갈 태도가 아닌가 싶다. 지금껏 일을 너무 애증의 관계로 어쩔 줄을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며 해 왔다면, 물론 그런 찐득찐득하고 뜨겁고 끓어넘치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내 건강과 앞으로 일을 해나갈 장기적인 여정을 생각하면, 이제는 조금은 거리를 두고, 일에 대한 애정이 상하지 않게, 소멸되지 않게, 오히려 거리를 두고 걸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직접 읽을 것을 추천하기에 여기엔 사진을 더 올리지 않으려 한다. 정말, 그림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다. 전혀 쉽게 쓰여진 책이 아닌 것 같은데, 또 그게 막 억지스럽거나 티가 나는 게 아니라 절묘하게 혹은 무심하게 묻어나서 작가가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를 기르는 법]도 너무 좋았고 [이세린 가이드]도 참 좋다. 김정연 작가의 다음 작품이 너무나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