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1994년, 은희는 중학생이다. 엄마, 아빠는 떡집을 운영하느라 바쁘다. 열쇠로 문을 열고 홀로 집에 들어서는 날이 부지기수다. 그래서일까, 은희는 바깥을 맴돌 때가 많다. 친구 지숙과 놀거나, 남자친구를 만나거나, 학원에 간다.
아빠는 그 시대 가부장의 전형이다. 딸들에게 무심하고 아들만 챙긴다. 춤을 추러 나가 바람을 피운다. 엄마는 아빠에게 무시당하며 노동에 지쳐 무기력하다. 은희의 언니는 밤늦도록 밖을 쏘다니며 노느라 바쁘다. 오빠는 걸핏하면 은희를 팬다. 콩가루 집안에서 은희는 억눌린 채 숨죽이고 지낸다. 학교에선 공부 못한다고 무시당하고, 날라리로 찍힌다. 믿었던 친구에겐 배신당한다. 귀 뒷쪽엔 알 수 없는 혹이 자란다. 은희는 축 처진 어깨로 힘없이 걷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한문 학원의 영지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영지 선생님은 은희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이야기를 들어준다.힘들 때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말한다. 때리면 참지 말고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고 한다.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해 주는 선생님을 통해 은희는 조금씩 변화한다.
은희가 겪는 갖가지 사건을 통해 영화는 중학생의 삶이 어른과 다를 바 없이 괴롭고 지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변 어른들은 은희를 그저 어린애 취급하거나, 어른처럼 알아서 씩씩하게 행동하길 바란다. 일방적인 폭력의 대상으로 삼거나 혹은 무심하다. 때로는 부모의 떡집을 도와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 부르튼 손으로 돈을 세는 노동력이다. 열 네 살 소녀의 삶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1994년이라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무색하도록 현재와도 맞닿아 있다.
영화는 이제껏 여타 다른 영화들이 그래왔듯 여중생의 삶을 마냥 해맑거나 장밋빛으로 그리지 않고, 그저 은희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 그러면서도 질풍노도하는 중 2의 모습을 그린다. 시종일관 현실적이고 절제된 시선으로, 하지만 은근한 따뜻함이 깃든 시선으로 은희를 바라본다.
그런 은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영지 선생님이 있다.시선을 돌려 세상엔 참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타인을 함부로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알려준다. 아픔을 뿌리 째 뽑아버릴 수는 없지만, 어떻게 힘을 내서 딛고 살아가야 할 지를 알려준다. 타인을 통해, 세상을 통해 삶의 방식을 배운다는 것,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마주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 영향을 통해 은희는 한발 짝 성장한다. 여전히 나 밖에 모르는 중2일지라도 은희의 시선은 그 전과는 조금 다르다. 더 큰 인생의 파도를 겪으며 아프지만 손가락을 움직이며 다시금 일어나 걸을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