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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오 Mar 30. 2023

뒤죽박죽 우주, 엉망진창 인생, 정신없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나는 대학교와 터미널은 귀신같이 피해 다니는 지하철 노선이 놓인 지역에 살고 있다. 그래선지 배차간격이 들쭐날쭉하는 시내버스를 자주 타게 된다. 운전 거친 기사님들 때문에 마음이 안절부절못할 때도 많지만 운전도 매끄럽게 잘하시고 승객들이 타고 내릴 때 인사를 빠짐없이 해주는 상냥한 기사님들도 종종 만난다. 나는 가끔 그런 인사를 받을 때 나도 큰 목소리로 답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따뜻함을 느끼고, 수많은 정거장마다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게 힘드시진 않을까 의아함과 걱정이 들기도 했다.


사람에게 그런 신기함이 들 때가 있다. 인간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신기해하고, 신기해하면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44년 차 도어맨의 고객들을 향한 진심 어린 존중과 프로페셔널한 매너 같은 것들. 박봉에, 봉급이 넉넉해도 위험하고 거친 일을 하고, 보람도 없어 보이는 일을 하면서도 왜 그런 업무에 포함되지 않은 기분을 써댈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보람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을 해온 사람이다. 보람이라면, 어떤 일을 한 뒤에 얻어지는 좋은 결과나 만족감. 또는 자랑스러움이나 자부심을 갖게 해 주는 일의 가치.라고도 하는데, 좀 더 좁게 해석하면 나는 그것이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제공할 때 느끼는 만족감', 그리고 '내가 하루를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삶의 의미' 같은 것이다.


매일매일을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기엔 너무 똑똑하고, 너무 똑똑해서 사회의 계급을 일찍이 알아버린 사람들. 나는 그게 한국의 젊은 세대라고 생각한다. 허튼짓을 하고 드는 기분 좋은 생각들은 인지부조화의 결과이자 정신승리에 불과하며, 어느 정도 능력이 있고 지능이 있으니 어느 정도 대접받으며 내가 -혹은 사회가- 멋지다고 평가하는 일들을 하고 싶은 그런 마음.



이 영화에 나오는 아시안 가족은 이민자로서 하루하루 피 말리는 검열 속에서 살아간다. 매일매일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듯한 남편 웨이먼드와 삶을 방황하고 있는 딸 조이, 그리고 가정의 모든 고민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에블린이 있다. 에블린은 늘 신경이 곤두서있고, 매사에 긍정적인 감정이란 전혀 없으며, 자신의 꿈이나 욕구를 전부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가족들과의 관계도 나빠지고,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세무당국 조사를 받으러 가던 중 멀티버스의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는 웨이먼드가 나타나 에블린에게 뜬금없는 임무를 내린다. 그렇게 에블린의 삶은 모든 것이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되었다.


사실 이 영화는 코미디이자 SF장르이고,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정신없고 바쁜 흐름이라 요약해서 글로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다. 에블린은 수많은 우주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고, 어딘가에선 유명한 액션 배우로, 다른 어딘가에선 셰프로, 또 어딘가에선 핫도그 손가락을 가진 레즈비언으로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로 살고 있는 세계에서 온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말한다. "여기의 당신이 모든 우주에서 가장 실패한 에블린이다."


에블린은 언제나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망가진 걸까 질리도록 생각해 온 사람이었다. 만약 20대 때 지금의 남편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결혼하려던 나를 아버지가 붙잡아줬다면. 이민을 와서 빨래방 열지 않았다면. 수많은 가정 속에서 에블린은 매번 최악의 선택을 해온 것 같아 결혼하지 않고 자신만의 꿈을 이룬 다른 세계의 에블린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영화에선 에블린이 이런 환상을 품을 여유가 없다. '조부 투바키'라는 우주를 망가뜨리려는 악당을 무찌르기 위해서다. 알고 보니 '조부 투바키'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인 멀티버스의 에블린이 혹독한 연구 끝에 만들어낸 것으로, 현재의 우주에선 에블린의 딸 '조이'였다.



조부를 무찌르는 방법 따윈 없다. 조부는 온 우주 속 다양한 자신의 능력을 모두 다룰 수 있는 능력자였고, 그렇게 온 우주의 진리를 학습한 존재였다. 그래서 조부는 어떠한 감정과 희망도 없이 허무와 비관을 가지며 자신이 지나간 자리마다 모든 것을 부수고 죽이며 혼란을 만들어냈다. 에블린은 자신의 딸 조이의 얼굴을 한 조부를 만났다. 조이에게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부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지만 조부는 말을 듣지 않는다. 조부로서는 그 이유들이 모두 무가치하고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조부는 삶의 의미 따위는 없다는 걸 너무나 일찍 알아버린 사람이다. 조부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다룰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 전지전능하고 자유를 지닌 존재였다. 그는 이러한 능력의 결괏값을 알고 싶어 베이글 위에 올려놓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담긴 베이글은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조부는 이것이 삶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살아도 어떻게 아등바등 살아도 결과는 저런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지? 조부는 에블린에게 말한다. 조부는 이 우주에서 악당이라, 모두가 조부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에블린은 조부를 죽일 수 없다. 아니, 죽이지 않는다. 조부는 에블린의 딸이기 때문에. 에블린은 삶을 방황하는 조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조부와 싸운다. 조부의 폭력을 멈추고자 더 강한 폭력으로 대응한다. 조이를 붙잡고 다그친다. 잔소리를 한다. 조부가 지쳐서 그만두기를, 조이가 자신의 뜻을 알아차리고 잠자코 들어주기를 바란다. 에블린은 조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에블린의 사랑법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조이에게 쏟아부은 사랑은 조이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조부에게도 전달되지 못했다. 조부는 에블린에게 말했다. 자신만큼이나 잠재력을 발휘하고 있는 에블린에게, 네가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나와 싸워봤자 결국 결과는 저 까만 베이글이다. 그러니 그냥 나랑 같이 살자. 내가 마음을 고쳐먹고 조이로 얌전히 살아갈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버리고. 당신은 나를 설득시킬 수 없다. 그냥 나처럼 모든 걸 부수고 죽이면서 살자. 나는 당신이 날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해. 우리는 죽지도 못하는 존재니까. 그냥 어디 폐허가 된 행성의 돌멩이가 되어서 살자.



세상엔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나를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내가 갖지 못한 것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은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조부는 에블린이 자신을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이 우주의 허무함을 같은 허무함으로 상쇄시켜 줄 수 있는 사람. 폐허가 된 우주에 또 다른 돌멩이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블린의 주위엔 다양한 사람이 존재했다. 에블린에게 웨이먼드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웨이먼드는 조부를 막기 위해 쉼 없이 싸우고 다니는 에블린을 따라다녔다. 에블린이 조부를 해치려는 사람들과 싸우려고 할 때, 에블린을 막아선 유일한 사람이었다. 웨이먼드는 에블린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함께 하는 결혼생활이 피폐해지자 이혼을 결심했던 인물이다. 죽음 앞에선 이혼 도장이고 나발이고 에블린을 막아서는 게 먼저였지만. 애초에 웨이먼드가 에블린의 폭력을 막아선 이유도 어찌 보면 에블린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에블린은 늘 웨이먼드의 삶에 대한 태도가 불만이었다. 당장 내일 세무조사를 받아야 할 텐데도 민폐를 끼치는 단골손님과 춤을 춘다. 에블린의 의견을 존중하고 웃음기 어린 모습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아 보기만 해도 심란해지는 빨래 물품마다 장난감 눈을 붙여놔서 에블린의 심기를 건드린다. 에블린은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모든 삶의 걱정을 자신에게 떠맡기고 살아간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웨이먼드는 삶의 걱정과 불안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랬더라면 이혼 서류를 내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걱정을 에블린에게 맡기고 빨래방에서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웨이먼드는 에블린과 조부만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어리석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저 웨이먼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고, 오늘의 기쁨은 기쁨대로, 내일의 고난은 고난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폭력보다는 대화를, 원망보다는 사랑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에블린이 알지 못한 것을 웨이먼드는 갖고 있었다. 에블린이 세무조사 서류를 제출하지 않아 압류에 처했을 때, 에블린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웨이먼드의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하고, 빨래방 유리창을 배트로 깨부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수갑을 차고앉아있는 동안 웨이먼드가 다가온다. 웨이먼드는 담당 직원인 데어드리와 대화를 나누고, 서류 제출 기한을 일주일 연장했다고 말한다. 에블린은 그때, 자신이 실은 웨이먼드와 '잘' 살고 싶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에블린에게 웨이먼드는 가능성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에블린의 삶이 더 고단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웨이먼드 혼자만의 고생이었을지도 모를 일을 에블린은 그 고생을 나눠 짊어졌을지도. 물론 그건 내가 설명하고 있는 스토리라인의 지점에 한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에블린은 웨이먼드를 통해 가능성을 배웠다. 삶의 가능성. 오늘 하루를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이유. 내면엔 누구나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고,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 그리고 희망은 늘 존재한다는 것. 모든 걸 부숴버리려고 하는 조부와 그런 조부를 죽이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 악순환의 폭력의 굴레를 바꿔볼 방법. 에블린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에블린은 무엇이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부와 싸우지 않는다. 하지만 조부를 포기하지도 않는다. 조부를 죽이려는 사람들과도 싸우지 않는다. 에블린은 총알을 모두 장난감 눈으로 바꿨다. 정신없는 빨랫더미와 소품들이 장난감 눈알을 붙이면 장난기 넘치는 인형들이 되는 것처럼. 우스꽝스럽지만 그들 모두가 때로는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위협하는 외부의 것들을 없앰으로써 나를 안전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린 서로 애초에 싸울 필요가 없이 내면의 좋아하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면 된다는 걸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조부가 사실은 누구보다 에블린의 사랑과 이해를 갈구하고 있고, 에블린이 자신의 절대적 허무를 이겨낼 방법을 알려주길 바라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에블린은 조부에게 알려주기로 한다. 총알이 아니라 장난감 눈알이 붙은 세상을.


생명이라곤 어디에도 없는 폐허가 된 행성에 돌멩이에도 눈알을 붙이면 움직일 수가 있다. 또다시 부여받은 삶이 너무 끔찍해서 절벽에 몸을 던지는 조부 돌멩이를 따라 에블린은 몸을 던진다. 우리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건 실패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야. 떨어져도 우린 깨어지지 않을 수 있어. 조금 상처 난 돌멩이가 될 뿐이지.


조이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언제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 에블린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에블린은 늘 그 사실로부터 도망쳐왔다.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로. 어차피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당황스러운 결과가 벌어져도 희망에 희망을 따라가면 결국 도달하는 지점에 좋은 해결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조이와 조이 여자친구를 소개해준다.


갑작스러운 에블린의 변화에 조이는 화를 내며 울었다. 에블린은 조이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늘 하던 잔소리를 퍼붓겠다고 말한다. 너의 전부를 밑바닥까지 이해했으니까. 절벽에서 떨어진 돌멩이가 되고 나서야 에블린의 사랑은 조이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그들은 세무 조사를 성공리에 마쳤다. 사이를 회복한 조이가 영어 통역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또 다른 우주의 성공한 에블린의 능력을 쓰지도 못하고, 성공한 모습으로 되지도 못했다. 우주에서 가장 실패한 에블린은 어느 우주의 에블린보다 가장 먼저 삶의 의미를 만들어낸 존재가 되었다.


나는 이 영화가 웨이먼드가 없는 우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장난기 넘치는 두 감독이 웨이먼드 대신 건네준 선물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삶의 우중충함과 허무함을 느끼고서도 즐겁게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건네주는 정신없는 영화 말이다. 내가 오늘 하는 행위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돈을 벌자고 이렇게 지겹도록 사는 게 맞는 걸까. 내 감정을 소모해 가며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뭘까. 무언가 잘못 틀어진 것 같은 내 인생이 제대로 길을 갈 날이 오기는 할까. 우리는 습관처럼 지금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정답을 찾기 너무 용이한 사회라서 헤매는 순간순간이 너무 고역이다.


내 이러한 고민에 대한 정답을 누구라도 알려줬으면, 하고 바라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부모는 내 고민조차 이해 못 하고, 사회는 오직 한 가지 결과만을 요구한다. 나는 죽도록 노력했지만 변하는 건 없고 앞으로도 크게 좋은 쪽으로 변하진 않을 것 같다. 허무함을 회피할 만한 쾌락도 잠깐이고, 끝엔 지친 마음만 남아서 그냥 다음 생엔 바위나 산속에 거대한 나무 정도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카운트다운처럼 기후변화로 인해 인류가 멸망한다는 소식에, 혐오 범죄가 들끓고, 경제적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지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다정한 버스기사님은 타고 내리는 승객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는 수줍게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인사 없이 내릴 때보다 마음이 따습고 기분이 가뿐했다. 기사님은 자신의 인사가 승객들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아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건넨 작은 호의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가능성으로 다가갔으면 바라게 됐다. 적은 월급 받자고 하는 내 공부가 타인을 돕고, 돌고 돌아 내 인생에도 보람 있게 만들어줄 거라고 믿게 됐다. 내게 주어진 한 줌의 시간에 시간을 죽이는 듯한 행위들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요즘 사회답게 즐겁고 간편하게 정답에 가까운 답을 들을 수 있다. 무엇을 느끼든 영화가 끝나고 시작되는 4부는 여러분만의 최선의 우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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