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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오 Dec 18. 2021

<콩트가 시작된다>

인생이 콩트였던 사람이 콩트가 인생이 되는 시점


작년 여름, 진로를 정리한 적이 있었다. 해외 유학을 꿈꿨던 나는 내 능력의 한계와 환경적 어려움 그리고 심리적 불안감 속에서 많이 괴로웠다. 그때 상담 선생님과 진로 관련으로 이야길 나누다가 "지금 꿈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지만 차선책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때 선생님이 한 번 생각해봐줬으면 한다고 제안한 게 있었다. "언어는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해요. '꿈을 포기한다.'는 말을 무오 씨만의 언어로 다시 바꾼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때 "글쎄요....."라는 말 밖에 못 했다. 정말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는데.... 대체어가 생각이 안 났다. 포기한 게 맞잖아요... 내가 능력이 안 돼서 더 도전할 수 없겠다고 판단해서 그 꿈을 버린 거니까.. 포기한 거 맞지 않나... 그로부터 일 년 하고도 반이 지났는데도 상담 선생님의 말은 종종 생각났다. 풀지 못한 문제에 미련이 남아서 '대체 이 질문의 답이 뭘까?' 생각했다.



시간과 돈을 오래 투자할수록 포기하는 건 어려워진다. 재수생보다 삼수생이 수능을 포기하는 게 어렵고, 삼수생보단 사수생이 공시를 그만두는 게 어렵다. 해외 유학에 대한 나의 꿈은 2017년 만들어졌고 2020년에 끝을 냈으니 약 4년을 끌어온 셈이다. 4년의 돈과 시간을 내려놓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꿈'의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도 적어도 '노력'에 대한 신화가 있다. 내가 열심히 살아왔으니 무언가 얻어내리라는 믿음.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열심히만 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 신자유주의 경쟁 시대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은 더욱 그렇다.


근데 세상엔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이 너무 많다. 젊음이 깨지는 순간은 이럴 때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성공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라서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3년을 더 하면 이루어질까? 5년을 더 하면? 10년을 더 하면? 실패의 낙인이 해마다 찍히는데 그걸 견디면서 성공을 기다려야 한다.


<콩트가 시작된다>는 그렇게 좌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20대 후반들의 이야기이다. 10년 무명 개그맨 트리오 '맥베스'와 해체 일 년 전 '맥베스'에 입덕한 리호코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이 드라마를 고른 이유는

1. 왓챠를 끊어놨고, 보고 싶었던 하코즈메와 미우를 다 봤다.

2. 왓챠 추천 별점이 4.5를 넘었다.

3. 잔잔하지만 계속 보면 감동적이고 캐릭터와 감정선이 좋아서 자꾸 생각난다는 평이 있었다.

4. 20대 청춘의 반짝반짝 도전 이야기가 아니라 꿈이 좌절되고 현실에 직면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와~ 좌절, 실패? 되게 우울하겠네.... 싶은데 팍팍하게 사는 사람도 친구들 만날 땐 웃고 재밌게 놀면 즐겁고 한 것처럼 이 드라마도 소소하고 따듯하고 재미있다.



고등학교 때 개그맨 트리오 맥베스를 결성하여 콩트를 시작한 하루토, 쥰페이, 슌타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도전한다는 점에서 주위 사람들은 멋있다고 칭찬했고, 젊음의 특권이기에 그들을 응원했다. 하지만 10년 차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그들은 무명이었고, 재밌어하는 사람은 적고, 수입이 없어 셋 다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했고, 빈 관객석에 익숙해지기만 했다.


스물여덟. 친구들은 취직하고, 결혼하고, 월급으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독립도 하는데, 이들은 매일 탄수화물 밖에 없는 식단에 낡고 좁은 집에서 셋이 모여 살고 있다. 첫 결성할 때 딱 10년. 10년만 하고 안 되면 해체하자고 했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츠무기와 리호코


리호코는 노력의 신화를 믿고 노력을 즐거워했던 사람이었다. 열심히 했을 때 돌아오는 성과로,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을 가서, 대기업에 취업했다. 그러나 기업 내 따돌림으로 업무 상 문제를 본인이 책임을 지게 되면서 퇴사를 결심하고 그 이후로 히키코모리가 되어 지냈다.


이후 동생(츠무기)의 보살핌으로 바깥을 나가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되는데, 패밀리 레스토랑에 와서 매주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가는 맥베스 팀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대로 입덕하게 되어 엄청난 광기의 오타쿠가 된다.



리호코는 인기가 없어도 언제나 즐거워 보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맥베스 팀이 멋있어 보였다. 맥베스의 콩트를 보면서 자주 웃고 행복해했다. 무기력하고 자신 없는 삶을 사는 리호코에게 맥베스는 사랑과 관심을 주고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맥베스를 사랑하는 시간만큼은 현실을 회피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하루토도 쥰페이도 슌타도 모두 각자의 고민이 있다. 하루토는 사이비 종교 때문에 히키코모리가 된 형이 있고, 쥰페이는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으며, 슌타는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와 절연을 했다. 리호코의 동생인 츠무기 또한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 남을 돕는 일에서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꿈은 사람을 지켜준다. 10년 동안 맥베스는 하루토와 쥰페이와 슌타를 지켜줬었다. 가난하고 쪽팔린 경험이 있어도 그들은 즐거웠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듯 그들은 10년 동안 좌절과 열등감에 빠져들어갔다. 이 드라마는 그 자연스러운 변화를 잘 담아내고 있다. 일을 제안한 동창의 목적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 성공한 동창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순간. 맥베스를 계속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에 대한 같은 팀원의 진심조차 의심하게 된다. 사소하지만 우리의 삶 그 자체인 일들이 회차마다 제시되고, 위트 있게 그들의 콩트과 접목되어 설명된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 과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매일 "무턱대고 해봐!"라고 말하던 고등학교 선생님이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니?"하고 말을 할 때. 부모님이 나이 들어갈 때. 같이 일했던 개그맨 듀오가 해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꿈에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질수록 투자한 시간이 되돌려주는 삶의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여전히 어렵고 막막한 것이다.


그리고 두렵다. 이력서에 한 줄 쓸 경험 없는 텅 빈 시간들. 꿈을 접고 나면 내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기분. 사회에 나가면, 나는 아무것도 한 적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것은 하루토, 쥰페이, 슌타, 리호코, 츠무기 다섯 명의 주연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왼쪽부터 쥰페이, 슌타, 하루토


그들은 결국 해체를 결심한다. 쥰페이는 가업을 이어받고 여자 친구와 결혼을 결심하고, 슌타는 하고 싶은 일을 이루기로 하고, 하루토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보기로 한다. 이 드라마는 '해체했다.'는 단어 하나를 20대가 어떻게 소화하는 지를 천천히 보여준다. 해체한다는 건 이별한다는 것과 같았다. 10년간 함께 한 추억들을 다 치우고, 같이 쓴 물건들을 나누고, 집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꿈의 실패를 어떻게 앞으로의 인생과 연결시킬 것인가. 어떤 의미로 만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리호코는 맥베스를 통해 일어설 용기를 얻는다. 쥰페이의 여자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헤드헌터를 통해 면접을 본다. 자신만의 기준을 잃어버렸던 리호코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꽃꽂이 동아리 활동 경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회사의 화병 관리가 잘 되어있다는 이유로 그 기업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츠무기 또한 야구부 매니저 활동했던 경험으로 맥베스의 (구) 소속사에 지원하여 매니저 활동을 시작한다.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삶 속에도 나만의 것은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루토는 자존심이 세고 감정 표현이 서툴지만 맥베스에 대한 애착이 가장 컸던 인물이고, 해체 과정에서 많이 울었다. 슌타의 자동차를 팔기 위해 마지막으로 세차를 할 때, 10년의 추억이 담긴 자동차를 보내면서 많이 울었고, 집의 냉장고를 누가 가져갈 것인지 가위바위보를 할 때, 언제나처럼 요란한 리액션을 떨며 하던 가위바위보에서 눈물을 쏟아낸다.


덕질의 정석을 보여주었던 리호코


꿈이 내 인생이고, 내 전부 같을 때가 있다. 진정한 나를 이루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만큼 그 꿈이 좌절되면 내 쓸모가 사라진 것 같아 괴롭다. (고시 준비나 취업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꿈이 좌절되어도 내가 도전했던 일들은 경험이 되어 남아있다. 그리고 때론 꿈의 일부가 내 인생이 되기도 한다. <물 문제>의 수리공 역할로 콩트를 시작했던 하루토가 결국 <물 문제>의 수리공이 되는 것처럼. 콩트는 인생과 닮아있고, 내 인생이 콩트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드라마를 보고 상담 선생님의 질문에 뭐라고 답할지 정할 수 있었다. 나는 꿈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 꿈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 20대 이 순간 해외 유학을 가진 못 했지만, 평생 동안 한 번쯤 다녀올 유학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해외 유학을 가야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관계나 성취감을 이곳에서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현실과 부딪히는 동안 나는 성장했고, 아픔이나 좌절을 통해 무너져도 일어날 궁리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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