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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오 Dec 18. 2021

최은영의 밝은 밤

여전히 '밤'인 건 변함없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은 밤


나는 장편 소설을 읽지 못한다. 흔한 판타지 소설 시리즈도 1권을 겨우 읽으면 2권에서 흥미가 식어서 덮어버린다. 어렸을 때는 두꺼운 책을 읽는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 해보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집중력이 부족한 편이구나 받아들이고 멋있어 보이는 건 포기했다.


그러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발견했다. 한국 소설이 읽고 싶어 져서 서점에 갔을 때 눈에 들어온 작가였다. 쇼코의 미소 단편집으로 처음 알게 되었고, 글이 좋아서 이후로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단편집도 구매했었다. 사실 완벽한 나의 취향은 아니었고 내게 무해한 사람도 쇼코의 미소만큼의 감동이 있던 것도 아니라서 밝은 밤을 살까 말까 고민했었다. 그러다 인터넷 검색 후 좋은 리뷰가 많길래 믿고 구매했다.


밝은 밤은 4대에 걸치는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삶을 세대 순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글의 주인공은 이혼을 하고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못 한 채 홀로 서기를 하고 있는 중이고,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지 못 한 편이다. 주인공의 어머니 또한 주인공의 할머니와 사이가 서먹하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 주인공과 그의 할머니, 그들은 의외로 마음이 잘 맞았다.


4대에 걸친 글이기 때문에 회상은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교과서에서는 보지 못 했던, 시대적 혼란 속에서 교차하며 발생하는 여성들의 아픔이 일상적으로 묘사되어있다. 글을 읽는 동안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형식 때문에 초중반까지 지루함을 느꼈다. 그래서 책을 몇 번 읽다가 덮으면서 긴 시간에 걸쳐 읽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포기하지 않고 읽은 이유는 인터넷에서 화자 되는 호평을 나도 이해하고 싶었고, 사실 시간이 좀 많았다. 그래서 장편 소설 못 읽는 성미로도 끈덕지게 읽을 수 있었다.


지난 주말, 마침내 완독을 하고 몇 가지 느꼈던 점들이 있다. 특별하지 않은 여성들의 삶과 정서를 따라가는 일은, 300페이지 넘게 할애된 그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읽어 내려가는 일은 여러 날 동안 모르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애정은 거리와 반비례해서 결국 가까이 있고 자주 만날수록 호감이 생긴다. 아무리 짧고 강렬한 만남을 하더라도 미적지근하고 길게 이어진 인연의 밀도를 능가할 순 없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장편 소설을 읽게 되는구나 이해했다. 지루한 서론(무관심이 섞인 첫 만남)을 지나 긴 본론(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지나서 휘몰아치는 결론(서로에게 깊이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 부분에 다다르면 그것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나한테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느 집안이든 한 두 명 있을 법한 인물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담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일제 강점기와 전후 세대의 여성들. 그래서 자신의 감정도 서술하지 못하고 자신의 굴곡진 삶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할머니들. 그런데 먼 훗날 자기보다 30살, 40살 어린 여성들이 아주 신중하고 세심한 언어로 삶을 적어내려 갔다. 책을 읽고 나서 나의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도 사회의 차별에 의해 아픔을 겪어야 했다. 우리 할머니의 삶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긴 이야기가 되겠구나 싶었다. 때로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이해하지 못할 갈등을 빚었던 할머니의 삶을 긴 이야기로 읽게 된다면 어쩌면 좀 더 이해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주인공이 엄마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여전히 장편 소설은 내게 장벽이지만 밝은 밤을 읽으면서 장편 소설이 주는 장점은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장편 소설을 읽는다는 건 썩 관심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과정과 비슷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첫 만남에 호감이 없으면 시작하길 원치 않아했던 내 성격에도 그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장편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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