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피 디스크에서 발견된
대략 1987년에서 8년 즈음이라고 생각된다. 돌아보면 어제 같은데 30년이 넘었다.
내가 중학생었던 시절, 아버지는 내게 당시로선 상당히 과분한 16비트 XT 컴퓨터를 사주었다. 당연하지만 난 그 컴퓨터로 주로 게임을 했는데, 당시엔 게임을 구입할 수 있는 경로조차 많지 않아서 근처 아파트 상가 1층의 컴퓨터 가게에서 게임을 불법으로 복사해오곤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플로피 디스크 한 장에 게임을 복사해주는데 15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 당연히 플로피 디스크는 돌고 돌고 복사하고 삭제하고를 반복해 이제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공공의 플로피 디스크가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주인 없은 usb 정도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어느날, 어떤 게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게임을 복사해 집으로 돌아와 실행을 시키려고 디렉토리의 실행파일을 찾아보는데, 그 안에 어떤 TXT 파일이 있었다. 가끔 게임 설명이나 뭐 그런게 들어있는 텍스트 파일이 있긴 해서 그런 것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왠 일. 그 안에는 한 연애편지가 쓰여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절절한 편지. 심지어는 공일오비가 '동전 두개 뿐~'이라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훨 씬 전에 그런 내용까지 담겨 있는 편지였다. 과연 이 편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당시엔 인터넷은 커녕 PC통신도 하지 않았기에 결국 이 편지의 주인공은 찾지 못했다. 나보다도 한참이나 나이가 많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지금쯤 중년이나 노년의 나이가 되었을 그 남자가 궁금했다. 그래서일까, 그 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주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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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었나.
하얀 백지 위에 너의 이름을 적어 놓고 그 첫 말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밤 두시 세시까지 시작하지 못한 그때가 정말 언제였었나. 나는 피곤치 않았다. 잠은 저만치 물러나 나의 정신은 새벽처럼 명료했었지. 너에게 편지를 쓰는 그시간은 웬일로 시간은 바퀴를 단 듯 굴러가 어느 사이에 밤 두시도 되고 세시도 되곤 하였어. 지금 생각하면 쿡 웃음도 나는 일이지만 나는 그때 진지하였다. 과연 내가 너에게 해야할 말이 무엇인지 이상적인 고민도 하였고 하필이면 말이 아닌 글로서 너에게 꼭 주고 싶은 말을 있는대로 모두 해야 할 것인지도 나는 깊이 생각했었다.
나는 밤마다 편지를 썼었다. 그때 편지엔 내 마음이 반절도 담겨지지 않은 것도 많았었지. 나는 거짓말을 했어. 거짓말을 한 편지만을 골라 너에 붙이곤 하였다. 되도록 내마음을 감추운 편지. 출렁거리고 넘쳐나는 그리움으로 몇 번이고 울고 싶었던 마음. 누구의 힘으로도 닫혀 지지 않은 문이 너를 향해 활짝 열린 속 마음은 따로 적어 서랍 속에 잠을 재웠다. 절대로 너 같은 거 보고 싶지 않는 마음만, 절대로 너 따윈 필요치 않는 마음만 적어서 너에게 보내곤 하였다. 때로 나는 거짓말이 어려웠다. 담담하게 상식적으로 그냥 안부 편지처럼 써내기가 힘이 들곤 하였다. 눈 딱 감고 너 좋아한다고, 너 보고 싶다고 해버리고 싶어서 붙이지 않은 편지엔 아마도 백 번은 넘게 너 좋아한다는 말을 썼다고 기억된다. 붙이고 싶었다.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를..... 하얀봉투에 네 이름을 적어 빨강 우체통의 입에 꽃잎처럼 떨구고 너의 회답을 기다리고 싶었다. 마음이 떨려 잠시 두 손마저 경련을 일으키는 감동적인 당신을 나는 받고 싶었다. 강렬하게......
나는 너에게 한 장의 엽서를 받은 일이 있었다. 가을이었다. 깊은 산일수록 더욱 뜨겁게 앓아 그 몸이 벌겋게 숯덩이로 이글거리고 있을 그런 깊은 가을에 나는 너에게 한잎의 낙옆같은 엽서 한 장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왠지 엽서라는 그 은밀하지 못한 개방의 의미가 나에게 섭섭하게 부딪쳐 왔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간수하기 위해 은밀한 장소 하나를 머리에 떠올리고 다시 머리 속에서 그 장소를 옳기곤 하였다. 책갈피 속에 일기장 속에 패스포드 안에 옳겨 놓으며 서서히 한 장의 엽서는 낡아가고 있었다. 그 한 장의 엽서가 낡고 초라하게 멍들어 내 은밀한 서랍 속에 누워서 그것은 다시 새것으로 내 마음에 부활해 오곤 하였다. 더 따뜻한 내용으로 더 가까운 거리로 그것은 지금도 내 기억의 한 중심에 부활해오곤 하는 것이다.
언제였었나. 편지라는 말이 하나의 기억으로만 우리의 한 구석을 지키기 시작한 때는 그래 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대라는 것, 문명이라는 것에 우리는 흡수 당하고 속도에 대해 예민해지기 시작했었다. 편지를 쓰는시간, 편지가 전달되는 시간, 그것을 읽는 시간 조차 우리는 참아 낼수 없게 되고 마침내 편지를 쓰는 일이 쑥스럽기까지 하여 그 많고 많은 밤을 편지 쓰기에 몰두했던 나날을 경이롭게 뒤돌아 보게 되었다. 전화가 있었다. 몇개의 숫자만 돌리면 경쾌한 텃치로 들을 수 있는 너의 목소리. 그것은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말과 말이 이어지고 어둠의 세계, 소음과 혼란을 내통하는 탐지의 손길. 그렇다. 우리는 이것을 다행스럽게 받아들이고 만족해 하였다. 생각컨데 편지나 전화가 우리에게 권고케한 것은 화합이었다. 그 화합의 극치야말로 우리들이 요구한 삶의 행선지 약도이며 그 약도 속에 표시된 화살표는 우리가 언제나 머리 속에 지어 올린 빨간 벽돌집 앞에 멎을 것이다. 나는 너를 부를 것이다. 되도록이면 빠른 속도의 전달을 택해서 너를 오게 하고 적당한 조명 아래 음악이 흐르는 식탁, 한 잔의 차를 준비하기위해 물이 끓는 식탁 앞에 나는 너를 마주하여 않으리라.
나는 전화를 했었다. 저녁 거리가 혼잡을 이루는 러시아워의 사람들의 틈새를 걸어 가다가 눈에 띄는 사각의 공중전화 박스에 강한 눈길을 주게 되었다. 언젠가 편지를 쓰기 위해 흰 백지를 펴고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이듯이 나는 십원짜리 동전 두개를 오래도록 손안에 쥐고 서서 어쩌면 회사가고 없을 너의 전화번호를 돌리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가 많았다. 기어이 나는 그 작은 구멍에 동전을 떨구고 오른쪽 귀에 몸하나의 긴장을 집중시킨 채 너의 목소리를 기다리곤 하였다. 때로 나는 너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 수화기를 놓을 때도 있고 숫자를 두어개 돌리다 말고 수화기를 놓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여보세요. 때로는 익숙한 너의 목소리가 전선을 통해 내 귓가에 부어질 때 그 첫마디에 말문이 막혀 수화기를 놓아버릴 때도 있었다. 마치 어느날의 편지가 내 마음과는 달리 전혀 다른 방향으로 써 내려가 듯 그래서 정직하지 못한 스스로의 행동을 혼자 얕보던 그때처럼 나는 너의 첫 목소리를 수화기를 놓으므로 싹둑 잘라버리는 나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비양거리곤 하였다. 역시 나는 너에게 편지를 써야 했다. 식구들이 모두 잠자고 그 누구도 내 방을 노크할 사람이 없는 그런 시간에 책상 위에 놓인 하얀 종이는 이미 너에게 줄 말들이 숭어때처럼 무리지어 우굴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가장 아끼던 영혼의 낚시대를 그 적나라한 환상의 수면에 드리우고 생명의 비늘이 빚을 발하는 사랑의 언어를 물어 올려 한바구니의 가득한 편지를 너에게 띄우고 싶어한다.
언제였었나. 내 마음의 절반도 못 담은 편지. 거짓말만 되풀이 해서 자신의 노출을 그리도 무서워 했던 어느 날의 편지와는 지금은 달리 해야지. 역시 나는 편지를 써야겠어. 길을 걷다가 눈에 띄는 우체국은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야. 한 장의 엽서가 모자라면 두 장을 써도 좋겠지. 사람의 마을 여는 건 사람의 마음이라 하더군. 나는 편지를 쓰겠어. 귀가길에서, 여행길에서 잠을 자기 위해 전등을 끄는 마지막 시간까지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사람의 힘으로 열수 있는 한계의 가장 마지막 문을 열었으면 해. 이미 나는 너에게 그 문에 적중한 키를 은밀히 건네주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