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발견하다
타닥타닥, 짙은 갈색의 맨발이 바쁘게 움직인다. 흙탕물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밟는다. 시커먼 먹물이 내 옷에 튀었다. 아이씨! 매섭게 노려보았다. 미안한 듯 허연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 지나가는 이들. 필리핀 사람들의 피부색을 구릿빛이라 하긴 어려웠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뜨거운 불에 바짝 졸인 갈비찜을 연상시켰다. 나는 상대적으로 하얗게 동동 뜬 까만 머리 백인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마치 어린 시절 노란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미국 아이를 바라보던 내 것과 같았다. 소복하게 쌓인 노란 망고 위로 수백 개의 까만 눈동자가 쉼 없이 움직였다.
필리핀 바기오 재래시장 한복판. 시장 안은 후덥지근했다. 과일은 달콤했고 생선은 비릿했다. 야채의 풋풋함까지. 필리핀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높은 하늘 아래 답답한 공기가 시장을 가득 메웠다. 상인들은 무더위에 익숙해 보였다. 한 상인이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한가운데 가슴을 훤히 드러내는 여인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본 것 같아 얼른 눈을 피했다. ‘웽웽’ 파리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생선 가게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상인은 쪼리 하나 달랑 신고 있었다. 그가 생선을 집어 올리자 내 발 위로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캔버스 신발에 물이 고였다. 찝찝했다. 바닷물은 끈적끈적함을 남겼다.
주룩주룩.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시장 안 사이사이로 굵은 비가 떨어졌다. 시장 어린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쪼리를 신고 첨벙첨벙 물놀이를 했다. 가게 처마로 흘러오는 빗물이 폭포가 되었다. 아이들은 시원하게 샤워를 했다. 세수를 하는 아이, 머리를 감는 아주머니, 통에 물을 담는 할머니, 발을 씻는 할아버지. 빗물의 용도는 다양했다. 비를 피해 한쪽에 서 있었던 나는 봉지에서 망고를 꺼냈다. 잠시 추춤하다 내려오는 빗물에 망고를 갖다 댔다. 방금 망고를 판 상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굿쨥" (good job!) 곧장 엄지를 치켜세웠다. 조금 전까지 구정물에 튀길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내 행동은 의외였다.
22년 전, 내가 본 필리핀의 시장 풍경은 이색적이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나를 만났다.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행동도 허용되었다. 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 없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였다. 갇힌 프레임에서 해방되었다. 자유로웠다. 시장에서 쪼리 한 켤레를 샀다. 발이 금세 더러워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빗물에 씻으면 그만인 것을. 그날 난 양파 껍질을 하나 벗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