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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쉼 Sep 16. 2021

내 가슴에 남은 아버지 흔적

2016년 4월. 아버지는 급성 혈액암 판정을 받았다. 가벼운 감기처럼 찾아온 암 덩어리는 아버지 몸을 소리 없이 잠식했다. 청천벽력 같은 진단에 가족들은 의사의 말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아버님의 경우 예후가 안 좋은 희귀성 악성종양입니다. 기본 항암치료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으니 신약을 한 번 써보면 어떨까요?" 의사는 약을 종류가 아닌 가격대로 구분하며 설명했다. 1회분이 천만 원인 약, 삼백만 원인 약, 대학병원에서 임상 중인 약. 세 가지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임상 중인 약은 비용이 무료인 대신 매시간 피를 뽑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환자를 시험 대상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천만 원짜리 약은 아버지가 반대했다. 우리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시도해볼 법한 신약으로 절충하여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1차 항암 이후, 믿을 수 없는 일이 기적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몸 안에 있는 암세포가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졌다. 남은기간 동안 마지막 삶을 준비하고 싶다던 아버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가족과 지인들.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기쁨도 잠시, 담당의는 재발을 언급했다. “신약은 1회만 사용합니다. 별다른 조취가 없다면 1~2개월 이내 재발할 거예요. 그래서 조혈모세포 이식을 추천합니다.” 


  큰 병 앞에 일어난 기적에 한 치의 의심 없이 골수이식에 동의했다. 골수이식 기증자는 자녀 중 한 명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주사기로 조금 오래 피를 뽑는 것이라는 담백한 설명에 가족들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했다. 당시 동생은 미국에서 바로 입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니는 뇌하수체선종 수술 경험이 있었기에 내가 이식에 동의했다. 아버지는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그렁댔지만 난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전혀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입원과 동시에 간단한 검사를 진행하는 동안 아버지가 그토록 병원을 싫어했던 이유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세포 이식을 위해 가슴에 작은 관을 삽입할 때였다. 바퀴 달린 침대에 누워 이동하는 동안 병원 가운 하나로 가까스로 가린 내 몸이 혹여나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됐다. 잠깐의 노출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술 전 남자 간호사 두 명은 무표정한 채로 상의 가운을 벗겨 내 몸을 훅 들어 시술 침대에 눕혔다. 그 순간 내 몸은 거대한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저 컨베이어벨트에 매달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발가벗은 몸뚱이였다. 병원 생활을 유독 힘들었던 아빠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나약한 게 아니었구나.’ 


  병원 생활은 아버지를 힘 빠진 사자로 만들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다 죽고 싶다던 어느 암 환자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직접 겪어보니 이제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 몸을 통제할 수 없는 환자가 아닌 인간답게 삶을 마감하고 싶었으리라. 아빠는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가 가족들만큼 강하지 않았다.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에 동의한 것도 마지막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자하는 마음, 딱 거기까지였다.

  이식이 결정되고 수술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무균 실에서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인사하고 나는 골수를 뽑았다. 3~4시간에 걸쳐 피를 뽑고 골수를 걸러내어 다시 몸에 나머지 피를 넣어주는 과정이었다. 내 몸이 허약해서일까? 다리 끝에서 얼굴까지 마비가 되는 부작용이 왔다. 위험 신호였다. 만약을 대비하여 필요한 기준 수치보다 피를 더 뽑으려 했으나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간호사는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보더니 뽑은 양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한 번 더 골수를 뽑고 바로 이식을 진행했다. 이식은 잘 되었다고 했다. 반응을 지켜보던 중 아버지에게 부작용이 나타났다. 중환자실로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2016년 10월 20일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가셨다. 청춘이라 불리는 그의 나이는 고작 65세였다.


 암세포가 깨끗하게 사라진 기적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이식에 성공하리라 믿었던 가족들은 그제야 준비과정 중 문제점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기증자와의 골수 적합성, 신약의 결과 등 모두 임상의 데이터로 남기기 위한 다양한 시도였음을 그것도 일 년이 지나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토록 무지할 수 있을까. 가족 누구든 골수를 이식할 수 있다는 말을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골수 적합성은 사전에 검사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검사 결과로 골수적합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환자와 가족에게 상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적이라는 비상식이 판단을 흐렸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후회만 남았다. 병에는 무지했고 아버지에게는 무심했다. 일상을 살아야 하는 나는 아버지에게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아버지의 고통을 진심으로 안아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온몸에 열이 불덩이처럼 올라오는데도 응급실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치료에 성실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아버지 건강으로 쇠약해지는 엄마가 위태로워보였다. 그런 아버지가 미워 더 살갑게 표현하지 못했다, 난 나의 삶과 일상을 더 우선으로 여긴 이기적인 딸이었다. 날 보며 씁쓸했을 아버지가 떠올랐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에 대한 내 마음의 크기가 너무 보잘것없었다, 엄마가 살며시 내 어깨를 감쌌다. "연정아, 너는 아빠에게 네 모든 것을 줬잖아. 너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골수를 빼 준 거야. 아빠는 그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대." 아빠의 바람대로 유골을 먼 바다에 뿌렸다. 기일이 되면 그저 바다를 보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내 몸에는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는 손톱보다 작은 수술 자국이 있다. 그것을 보며 아버지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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