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목사님은 화 한번 안 내죠? 애들이 복 받았네!” 어린 시절 내가 만난 어른들의 한결같은 멘트다. 누구를 위한 칭찬일까? 아빠는 웃었고, 우리 세 자매는 그저 의미 없는 미소만 지었다. 아빠의 목소리는 실로 카스테라 같았다.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심지어 말과 말 사이 따뜻한 온기마저 돌았다. 아빠와 대화하며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다. 아빠의 옆엔 교인들이 상시 대기 중이었다. ‘우리는 주 안에 한 가족’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그들이 내 자리를 차지했다고 여겼다. 매주 교회 단상 위에 서 있는 아빠는 만인의 연인이었다. 어린 나로서는 아빠를 공유하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하랴. 목회자란 그런 것이었다. 나의 유년 시절 아빠는 없었다.
나는 복 받은 아이였다. 화 한 번 안내는 목사님이 우리 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집에 교인들이 방문하는 날이면 엄마도 아빠를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중저음 음성과 정확하고 유창한 발음은 내가 듣기에도 좋았다. 그렇게 아빠의 목소리를 옆에서 듣기만 했지 직접 나눈 기억이 없다. 교인들을 만나 상담하며 주 4회 설교를 하는 목회자만 존재할 뿐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말씀 준비에 바빴다. 교회라는 공간을 집으로 옮겨왔을 뿐 해 질 녘까지 아빠는 목회자로 살았다. 내 눈에 비친 아빠의 삶은 나 홀로 릴레이 경주였다. 그런 그에게도 퇴근시간이 필요했으리라. 한 개인을 위한 휴식 시간과 공간이 절실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쉼을 누려야 할 타이밍에 그는 굳이 아빠의 역할을 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우리 세 자매가 바랐던 아빠의 모습과 정반대였다.
늦은 밤. 아빠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어 교사 출신이었던 아빠는 언니의 영어학습 진도를 확인했다. 언니는 아빠의 기대만큼 유창하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개미 소리에 아빠가 언성을 높였다. 왜 화를 냈을까? 언니를 향한 기대치 때문이었을까? 당신의 부재로 빚어진 결과에 대한 죄책감의 표현이었을까? 누구를 향한 분노였을까? 화 한번 안내는 부드러운 목사님 온데간데없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나와 동생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빠의 눈에 우리가 투명 인간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불똥이 튈까 몸을 한 껏 웅크렸다. 동시에 미치게 흔들리는 가녀린 네 개의 눈동자를 의식해서 이 순간에 마침표를 찍길 바랐다.
아빠로 출근하는 날은 적당히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어야 했다.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선 안 됐다. 서둘러 씻고 자야 했다. '아무렴 사자는 피하는 게 상책이지!’ 불을 끄고 잠에 빠진 듯 숨소리를 일부러 거칠게 냈다. ‘철컥’ 문 닫는 소리가 두 번 들리면 긴 날숨에 그제야 몸이 풀렸다. 하지만 이따금씩 오랜 시간 축척된 노련미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딱’ 둔탁하고 짧게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이내 소리 없는 경고음과 적색 사이렌이 울렸다. 노란 불빛 아래 아빠는 기어코 우리를 다시 깨웠다. 우리는 그날을 ‘새벽 기습공격’이라 불렀다. 눈물로 눈을 감는 날이었다. 시커먼 밤, 화장실 안에서 나는 소리 없이 외쳤다. '세상에 화를 안 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빠의 습격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기억 속 아빠는 나의 아빠도 목사도 아니었다. 우리 집엔 나긋한 사자만 존재할 뿐이었다. 아빠가 원했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그 행동은 아빠로서 최선이었을까? 당신의 자녀에게 보였던 날 선 관심이었을까? 우리는 아빠의 샌드백이었을까? 아빠도 혼란스러웠을까? 과거의 사건은 아련한 기억 저편으로 흘러 이젠 느낌만 남아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빠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말한 적이 있다. 두려움을 쓴 사건들은 각자의 관점으로 재해석되어 세 자매에게 또렷이 남아 있었다. 반면 엄마와 아빠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빠는 미안한 듯 자신의 미성숙함을 사과했다. 아빠의 고백으로 우리 가슴에 있던 시커먼 상처에 딱지가 생겨 아물었다.
30대 아빠. 안팎으로 리더의 자리. 그 나이에 그 무게를 어찌 견뎠을까. 삼십 대의 삶을 살아보니 아빠를 조금 이해하게 됐다. 아빠는 아빠였다. 타인의 시선이 아빠를 나누었을 뿐이다. 아빠를 규정하는 그 위치에서 나도 그들과 똑같이 아빠를 바라보았다. 이중적인 것은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는 목사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집에서는 당신의 신념을 가지고 양육자로 그 본분을 지켰던 것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각각의 자리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엄마는 학교 애들한테는 잘해주면서 왜 나한테는 그래?” 얼마 전 둘째 아이가 나에게 뾰로통하게 던진 말이다. 아이 눈에 비친 나는 과거 아빠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은 익숙해진 삶의 연속일까? 참... 부모란 그런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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