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살았던 네 해
나는 동생과 네 해를 함께 살았다.
그 시간은 동생에게는 삶의 마지막이었고,
내게는 평생을 두고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나날이었다.
군산에 사는 동생이 서수 집에 불쑥 찾아왔다.
'갑자기 웬일이여? 연락도 없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생은 주저앉듯 마루에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 나랑 같이 살자.
이젠 딸년도 필요 없고, 아들도 필요 없고,
혼자 살아야겠어. 언니랑 같이 살고 싶어.'
펑펑 울면서 매달리는 동생을 보며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자초지종을 말해야지, 천천히 말해봐.'
동생은 서울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영순이 년이 나하고 살면서 많이 힘들었다는 거야. 내 집에서 살면서 생활비 다 대주고 밥도 내가 다 해줬는데 그렇게 힘들었다는 거야.'
그 이야기를 서울에 사는 딸 영주가 미주알고주알 전해주었다고 했다.
'아들하고도 못살고, 딸년도 나하고 못 산다는데...
몸도 성치 않은 내가 이제 누구랑 살겠어.
언니, 제발 나하고 같이 살아.'
동생은 신장염으로 투석을 하고 있었다. 동국사 옆 이층 집에서 아래층엔 동생이 살고, 위층엔 영순이가 살았다가 결국 조카는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성질이 벼락같은 동생은 그날 이후
딸도 아들도 다 필요 없고 나하고만 같이 살자며 떼를 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린 손자들을 돌보아야 했다. 큰손자가 겨우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마음은 동생에게 가 있었지만,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날 동생 아들 정수가 왔다.
'이모님, 힘드시겠지만 엄마 한 번만 봐주세요. 저랑 같이 논산으로 가서 살자고 하니까, 큰 이모랑 같이 안 가면 절대 가지 않는대요.'
정수는 논산 병원 바로 옆에 아파트를 얻어 두었다고 했다. 주말에는 내가 서수에 가서 쉬고, 자신이 엄마를 돌보겠다고 했다.
결국 나는 국민학교 4학년, 3학년 손자 둘을 뒤로하고 동생을 따라 논산으로 갔다. 논산 아파트에서는 동생이랑 나랑 조카랑 셋이서 살았다. 셋이 살기에는 아파트는 널찍하니 컸다. 나는 아픈 동생 옆에 붙어서 돌보았다. 집안일은 살림해 주는 파출부가 왔다. 그래도 아침상은 내가 차렸다. 조카는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이모가 끓여주는 무우국은 진짜 시원해요.'라며 국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조카가 나가고 나면 동생과 내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고기보다 조기찜과 나물을 좋아하던 동생은 밥숟가락을 들 때마다 말했다.
'언니가 있으니 내가 너무 좋아.'그러면서도 나를 걱정했다.
'집에만 있지 말고, 낮에는 밖에 나가서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해요.'
정작 동생은 누워있기만 하면서 하루에 네 번씩 투석을 했다. 몸에 관을 꽂고 약통을 갈아주며 하루가 갔다. 동생 얼굴은 점점 까매져 갔다. 먹는 것도 점점 줄어들었다.
젊어서부터 약골이었던 동생은 한약을 달고 살았다. 영신당 한약방에서 늘 한약을 지어먹었다. 그게 신장에 무리가 됐다고들 했다. 논산에서 그렇게 동생이랑 4년을 살았다. 쉼터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말했다.
'형제간에는 싸워서 오래 못 사는데....
4년이나 같이 살았다니 참으로 대단하네요.'
우리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냥 동생이랑 서로 위해주며 살았던 것이다.
동생은 결국 죽도 넘길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갔다. 나는 죽어가는 동생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조카가 근무하는 병원의 요양원으로 동생을 데려갔다.
나는 서수에 돌아와서도 마음은 늘 논산에 가 있었다. 한 달쯤 지나 조카한테 전화가 왔다.
'이모,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불쌍한 내 동생은 아파서 고생만 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막내 동생은 캐나다에 산다. 사업에 실패해 이민을 갔지만, 그곳에서 다시 자리를 잡아 잘 살고 있다. 언니들을 초청하여 보름 일정으로 다녀왔다. 동생들과 나까지 여섯 이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나는 동생이 좋아하는 된장, 고추장을 챙기고, 동생댁은 김치까지 가득 챙겼다.
동생은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차로 약 30분 정도 가는 써리라는 곳에 살았다. 그림 같은 하얀 이층 집은 햇볕이 잘 들고,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막내 동생은 언니들이 고기를 좋아한다고 LA갈비를 한가득 준비하였다. 주변 공원은 너무 깨끗하였다. 어디서나 LA갈비를 구워 먹을 수 있을 만큼 깔끔하였다.
막내는 로키산맥 여행 상품을 예약해 놓았다. 또 캐나다의 서부 밴쿠버 여행을 했다. 빅토리아 섬의 더 버차트 가든에는 예쁜 꽃들이 만발해 아름다웠다. 동생들과 함께라서 여행은 더 좋았다. 갈 때는 된장 고추장을 쟁여 넣은 가방 속에 LA갈비를 꽁꽁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동생은 우리 집의 귀둥이였다. 위로 누나만 다섯에 막내로 태어난 아들이었다. 나는 어릴 적에 귀둥이를 업어주기도 하고, 밥 먹을 때 고기반찬을 얹어 주기도 했다. 막내 동생댁은 큰딸로 집안일을 척척 잘했다. 큰고모인 나를 잘 섬겼다. 어릴 적 누나들의 사랑을 받아온 막냇동생은 누나들에게 잘했다. 매형 제사일에는 잊지 않고 참석했다. 겨울에 눈이 펑펑 내려 운전하기 힘들어도 막내동생은 빠지지 않고 제사를 지내러 왔다.
논산에 살 때 정수네와 제주도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동생은 약 보따리를 들고 비행기를 탔다. 조카는 이모가 고생한다며 최고급 호텔에 숙소를 정했고, 매끼마다 회를 먹었다. 1인당 5만 원씩 하는 잠수함도 탔다. 가오리 떼들이 잠수함 곁으로 다가오는 풍경이 신비로웠다. 동생과 함께했던 제주 여행도 잊히지 않는다.
군산 동생이 떠난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조카가 왔다. 쇠고기를 잔뜩 사 왔고 내손에 용돈 20만 원을 쥐어주었다.
'이모님, 너무 감사합니다. 엄마가 이모님 덕분에 말년에 편안히 가실 수 있었어요.'
진심 어린 조카의 말에 나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논산에서 동생과 딱 4년을 살았다. 매일 눈뜨면 '성! 성!' 하면서 불러대며 내 곁을 떠나지 않던 동생이었다. 지금도 그 소리가 귀에 선하다.
동생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내가 덜 외롭지 않았을까.
주변에 동생들도, 아는 이들도
하나 둘 곁을 떠나고
이제 나만 남았다.
나도 이제 그만 가고 싶다.
내년 꽃피는 봄이 오면
좋은 날에
훨훨, 소풍 가듯이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