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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 품에서 자란 손자들

호기심 많은 첫째와 착한 둘째 손자

by 땡자랑

맞벌이를 하는 막내아들네 손자 둘을 내 손으로 키웠다.

힘든 줄도 모르고 마냥 예쁘기만 해서, 온갖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 시절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따르릉~'하고 전화가 울렸다.
'할머니, 저 일우예요. 회사에 합격했어요!'
'장하다, 내 새끼. 너무 잘했다. 언제 한 번 서수에 와라.'

어릴 적부터 총명하던 손자가 드디어 나라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에 합격했다. 가슴이 벅차 갑배네 집에 가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막내아들이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낳았다. 며느리가 선생이라 나는 말했다.

'손자는 내가 키워주마. 너는 걱정 말고 일해라.'

그 말에 며느리는 전주 살림을 정리하고 서수로 들어왔다. 백일 동안 며느리가 아이를 돌보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본격적으로 아이를 맡았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다시 안아 본 아기는 너무 신기하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아들 넷을 키울 때는 농사일에 바빠서 아이를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백일 갓 지난 아이를 온갖 정성을 다해 돌봤다. 지저귀 갈아주고, 젖병을 삶아 분유 먹이고, 목욕시키는 일이 새롭고 애틋했다.


첫째에 이어 연연생으로 둘째 이우가 태어났다. 일우만 볼 때는 아이를 업고 밭에 나가 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자가 둘이 되니 꼼짝도 못 하고 아이를 봐야 했다. 아직 사랑받아야 할 어린 일우는 동생이 태어나자 질투가 심했다. 이우가 자지러지듯이 울어서 달려가보면 동생을 깨물어 울리고, 눈을 찌른 적도 있었다.


일우와 이우는 둘 다 업어주면 좋아했다. 둘은 내 등에 업히겠다고 매달려 올 때면 나는 그냥 방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그러면 일우는 울면서 내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할머니, 일어나! 업어줘!'

그 작은 손으로 잡아당긴 내 샤스가 몇 벌이나 늘어났는지 모른다. 아랫집에 사는 영대네 아버지가 마당으로 지나가면 일우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업어 달라고 떼를 쓴다. 결국 영대네 아버지는 일우를 업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기도 했다.


일우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갑배네 집으로 마실을 가면 싱크대 문을 열어 그릇을 다 꺼내 놓았다. 갑배네는 싱크대 문을 노끈으로 묶어서 닫아야 했다. 우리 집 장독대 뚜껑도 얼마나 깨뜨렸는지 모른다. 장독대에 올라가 안에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려고 뚜껑을 패대기쳐버려 뚜껑이 산산조각이 났다.


제법 걷기 시작하니 마당으로 자박자박 걸어 나가 놀기 시작했다. 일우는 동물을 좋아해서, 마당에 있는 강아지와 잘 놀았다. 특히 닭장 안에 있는 토끼를 더 좋아했다. 토끼에게 풀을 뜯어서 집어넣어 주면서 놀았다. 한참을 놀다가 졸리면 한발 한발 마당에서 마루로 기어올라 방에 들어가 아무 소리 없이 잠을 잤다.

'어쩌면 그렇게 애기가 순하냐!'라고 갑배네는 항상 칭찬을 하기도 했다.


텔레비전을 틀어주면 빠꼼히 소리 나는 곳을 보기 시작했다. 특히 뉴스 할 때는 집중을 더 잘했다. 나는 바쁘면 일우에게 텔레비전을 틀어주고 잠깐 밭에 나가 일을 하기도 했다. 꼼짝 않고 텔레비전을 보는 손자를 보며 '일우는 꼭 큰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일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때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둘째 이우는 너무나 착한 아이였다. 형한테 자주 당하면서도 항상 형을 따라다녔다. 둘이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이우는 업고 일우는 손을 잡고 걸려서 갔다. 이우가 네 살 때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소아과에는 환자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중앙에 있는 미끄럼틀에서 놀고 있었다. 갑자기 우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아픈 이우가 형을 때린 덩치 큰 애를 밀어냈다. 주변에서 엄마들이

'어쩜! 형제밖에 없다니까, 아픈 애가 형 맞았다고 덩치 큰 형한테 덤비냐.'라며 놀라워했다.


어느 날 나는 동생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한눈을 판 사이에 젖병을 물고 있던 이우가 갑자기 울음 터뜨렸다. 돌아보니 입 주변이 피범벅이었다. 허겁지겁 아이를 업고 서수 보건소로 뛰어갔다. 보건소에서는 응급처치를 하고 대야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갑천이 차를 빌려 타고 급하게 서해병원에 갔다. 다행스럽게 의사 선생님이 큰 상처는 아니라며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며느리가 퇴근할 시간이 되니 가슴이 벌렁벌렁 해졌다. '애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고 탓을 하면 어쩌나?' 잘못을 저지르고 선생한테 혼날 준비를 하는 학생처럼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며느리는

'어머니 놀래셨지요? 아이들이 크면서 다치기도 하지요.' 라며 되래 나를 위로했다. 나는 속으로 너무나 미안했고 며느리에게 고맙기도 했다.


막네아들이 구암동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 네살, 세살 손자들을 돌보며 함께 살았다. 구암동에서는 손자들은 어린이 집에 다녔다. 어린이집에 보내면 이우는 울며 다시 집으로 와 한참을 고생했다. 일우는 어린이집에 가더니 5층에 사는 친구를 사귀었다. 5층 며느리도 선생이었다. 승준이 할머니는 거의 매일 문턱이 닿도록 놀러 와 마치 한집처럼 지냈다. 승준이까지 세명의 아이들은 거실에서 뺑뺑거리며 놀았다. 아이들이 매일 뛰어다니며 노니까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여러 번 올라왔다. 매번 죄송하다고 사정을 했고, 애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실을 놀이터 삼아 놀았다.


일우가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식에는 엄마랑 같이 참석했다. 다음날부터 내가 일우를 데리고 등교를 했다. 담임 선생님이 내일부터 어머니가 아침에 교통 봉사를 해야 한다고 말하자,

일우가 손을 들고, '우리 엄마는 못 와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엄마가 무슨 일 하는데요.'라고 물으니까

'엄마가 선생님이라서 학교 가야 한다.'라고 야무지게 말했다. 일우랑 하교하는데 아이들이 '일우야, 너네 엄마가 선생님이라서 좋겠다.'라고 부러워했던 적도 있다.


이우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피아노 학원 차량이 통학을 시켰다. 그런데 이우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학원 선생한테 전화가 왔다.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이우가 후진하는 차량에 치어서 다리가 부려졌다. 이우는 병원에 입원을 했고, 뼈가 잘 붙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때 놀랐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우가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녀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왔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우가 나오지 않았다.

친구에게 '이우가 왜 나오지 않느냐?'라고 물으니까 교실에서 친구랑 싸우고 있다고 했다. 정신없이 반으로 가보니 이우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겨우 뜯어말리고 '왜? 싸웠냐.'라고 물으니 친구가 색종이를 빌려 가고 안 준다고 했다. 마침 담임 선생님이 와서 서로 화해를 시켰다. 집으로 오면서 나는 이우에게 학용품은 친구에게 나눠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우는 성격이 좋아서 친구가 많았다. 승준이가 놀러 와도 이우하고 잘 놀았다. 학교에서 일우가 왔는데 어린 이우가 오지 않았다. 일우에게 물으니 이웃 동네에 사는 형을 따라갔다고 했다. 나는 놀라서 이우를 찾아 나섰다. 집도 모르고 약수터에서 혹시 놀고 있나 싶어서 약수터에 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만나는 동네사람에게 아이들을 못 보았느냐고 물어 물어 아이들이 있는 집을 찾아냈다. 그 집 마당에 들어서니 마침 이우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우를 끌어안고 울면서 '애고! 손자를 잃어버린 줄 알았네.'라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던 적이있다.


주중에는 구암동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주말이 되면 서수로 달려가 텃밭에서 일을 했다. 주말 내내 일하다가 월요일 아침 첫 차를 타고 구암동에 왔다. 텃밭에서 다듬어온 야채를 삶고 데쳐서 아침상을 차려서 며느리를 출근시키고 손자들 밥을 먹였다. 며느리는 봄마다 싱싱한 파나물, 시금치나물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며느리 여름 방학 때 서수에서 너머 밭 두 자리를 얻어 참깨를 심었다. 혼자 제대로 먹지도 않고 땡볕에 일을 하니 기력이 많이 쇠약해졌다. 개학 날이 되어 버스 속에서 깜빡 잠이 들어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다. 이십 분이 넘게 걸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지쳐서 누워 있다가, 냉장고에서 돼지고기 한 덩이를 찾아 삶았다. 학교 갔다 온 이우가 '할머니, 맛있는 고기다.'라며 삶은 돼지고기를 홀딱 집어 먹어버렸다. 나는 남은 국물이라도 들이켜니 조금은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퇴근한 며느리에게 '닭 한 마리 사다 먹자.'라고 해서 닭을 삶았다. 손자 둘하고 셋이서 닭 한 마리를 후다닥 먹어 치웠다. 그날이 평생토록 잊히지 않는다.


손자들을 키울 때는 몸이 아픈 줄도 모르고 사랑으로 키웠다. 지금 생각해도 손자들과 함께했던 세월이 가장 행복했다. 손자들이 어릴 적 내 무릎 위에서 잠들 때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다. 어쩌면 손자들이 육십 넘은 내 인생을 젊음으로 회춘한 듯 살게 한지도 모른다.


손자들은 지금도 명절마다 빠짐없이 선물을 보내온다.

큰 손자는 늘 말하곤 했다.

'우리 할머니는 지혜로운 분이에요.

사랑으로 우리를 키워주시고, 잘못하면 따끔하게 혼냈어요.

할머니 덕분에 제가 반듯하게 자랐어요."


할미 품에서 자란 손자들아!

똘똘한 너희는 큰일을 해내며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한다.


너희가 서수에 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나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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