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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살림에도 공부는 가르쳤어

아들 넷에 딸을 학교에 보내다

by 땡자랑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나는 아이들만큼은 배우게 하고 싶었다.

아들 넷에 딸 하나, 그 아이들이 내 가난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남편이 동네로 마실 나갔다가 점심도 못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어쩐 일이래요? 어제는 일찌감치 들어와 고구마 좀 같이 심자고 해도 콧방귀도 안 뀌더니.'

남편은 대답 대신 대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막내는 학교에서 아직 안 왔나? 오늘 산수 시험 는 날인데...'

마침 막내가 숨을 헐떡이며 대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오병아, 백 점짜리 시험지 가져왔어?'

막내는 가방을 뒤적이며 시험지를 꺼내 아빠에게 내밀었다.

시험지에는 간 색연필로 '100점'이라고 쓰여 있었다.

'와! 우리 막내가 산수 시험에서 백점을 맞어 왔네!'

남편은 시험지를 보고 한바탕 웃더니 막내 엉덩이를 토닥이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시어머니도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학교에서 또 백점을 받아왔어! 에구! 이쁜 내 손자!'

시어머니는 막내를 꼭 안아주고, 쌈지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넣어주었다. 막내는 나에게도 시험지를 자랑했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나가 놀지 못하게 한 보람이 있었다. 막내의 백 점짜리 시험지는 밖으로 나돌기만 하는 남편에게도 큰 기쁨이 되어주었다.

남편은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지론이 강했다. 그래서 가난한 살림에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 시절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국민학교만 보내고 바로 돈벌이를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아들 넷에 딸 하나로, 시어머니까지 여덟 식구가 함께 살았으니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은 '돈을 빌려서라도 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큰 아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산 고등학교 졸업한 후 수산 전문대학까지 졸업했다. 6개월 교원양성소를 수료하면 국민학교 선생을 할 수 있었다. 군산 중앙고에서 선생을 하는 제부는 큰 아들을 교원양성소에 입학시켜 선생을 시키라고 했다.

'일병아, 원양성소에 가서 선생 되거라.'

큰 애는 부모 말을 한 번도 거역하지 않던 순종적인 아들이었다. 그런 큰 애가 선뜻 대답을 안 했다. 남편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큰 애야, 동생들 학비도 늘어나고..., 니가 돈벌이를 해야겠다.'

그러자 아들은 결심을 굳힌 듯 딱 잘라 말했다.

'아버지, 저는 선생은 못하겠어요. 조그만 기다려 주세요.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고 있어요.'

남편은 점점 화가 나서 신세 한탄까지 섞어서 아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큰애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는 풍금도 칠 줄 모르고, 그리기도 못하고, 어째든지 선생은 하기 싫어요.'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큰 아들은 서울에 사는 막내 제부가 추천하는 토건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울산으로 떠났다.

둘째 이옥이는 매우 총명한 딸이었다. 다섯 살 무렵부터 아랫동네 집사님과 딸을 따라 교회에 다녔다. 교회에 가면 사탕과 과자를 받아왔다.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서 배운 노래와 춤을 나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에는 크리스마스 공연을 준비하느라 밤늦게 오는 날이 많아졌다. 남편은 그런 딸을 못마땅해했다.

'이제부터 교회에 가지 말아라.'라며 혼을 냈다. 옥이는 울면서도 끝까지 교회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누굴 닮아 저리도 고집이 세다냐?'라며 시어머니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나는 바로 말대꾸를 했다.

'누굴 닮겠어요? 꼭 지아버지 성질머리 그대로죠.'


남편은 '딸은 국민학교만 졸업시키면 된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딸도 배워야 한다.'며 옥이를 중학교까지 보냈다. 큰아들과 이옥이까지 등록금이 큰 부담이었지만 더 열심히 일을 했다. 이옥이는 중학교 3학년이 되어 기술과를 선택하더니 취직을 해서 살림에 보태겠다고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옥이는 아랫동네 숙자를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구로 공단의 봉제 공장에서 옷 만드는 재봉사로 일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셋째 삼병이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고장 난 기계는 삼병이가 손대면 멀쩡해졌다. 남편이 논을 담보로 하여 외상으로 경운기를 사 왔다. 방위로 서수 지서로 출퇴근했던 삼병이는 며칠 만에 경운기를 능숙하게 몰았다. 네 논갈이를 경운기로 해주고 품삯을 받아오기도 했다. 서울에 사는 제부가 경운기를 운전하는 삼병이를 보고 말했다.

'형님, 삼병이는 서울에서도 돈을 벌 수 있겠어요. 우리 회사에서 포클레인 운전기사로 뽑는데 병이를 취직시킬게요.' 그리하여 삼병이도 서울로 올라갔다.


넷째 병이는 키가 크고 잘생겼다. 옛말에 '셋째 딸은 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말이 있듯이 병이는 내가 봐도 근사했다. 잘 생겼다고 칭찬을 받아 온 사병이는 공부는 뒷전이었다. 매일 밖에 나가 놀기를 일삼았고 항상 친구들이 많았다. 놀기만 하더니 기 사립 고등학교 들어갔다. 성질이 급한 것이 꼭 지아부지를 닮았다. 논에 나가 같이 일하자고 사정해도 집밖으로 나가 놀다가 오밤중이 되어 들어왔다. 빈둥거리며 놀더니 돈벌이를 하겠다고 형들을 따라 서울로 떠났다.


세 아들과 딸은 서울로 돈벌이를 하다고 떠났고, 막내인 오병이 집에 남아 농사일을 도왔다. 논두렁 풀베기, 물대기, 농약주기 등 힘든 일을 나와 함께 했다. 형들이 집에 있을 때는 책가방 던져 놓고 나가 놀기 바빴던 막내였다. 혼자 남으니 이삭 필 때쯤에는 논에 나가 새를 쫓는 일도 잘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오병이가 말했다.

'엄마, 저 대학에 가고 싶어요.'

'잘 생각했다. 오병아, 집안일은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 엄마가 등록금은 어떻게든 마련하마.' 막내가 대학에 합격만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르치고 싶었다. 막내는 3학년이 되어서야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한해를 재수하고, 다음 해에 국립대학에 합격을 했다. 전주로 학교에 가기 위해 복으로 세 번씩 버스를 갈아타면서도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새벽에는 논일을 돕고 학교에 가는 바쁜 대학 생활을 했다. 등록금이 모자라면 군산 사는 동생집에 가서 돈을 빌려오곤 했다. 그리고 농사철에 열심히 남의 집 일까지 다녀서 빚을 갚았다.


막내가 4학년이 되던 해에, 서울에 사는 큰아들로부터 편지와 함께 돈이 왔다.

등록금 50만 원, 그리고 막내 용돈 5만 원.

'어머니, 동생 등록금 한 번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 보냅니다.'

편지를 읽으며, 돈을 모으느라 고생한 큰 아들을 생각하니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한량처럼 밖으로 나돌던 남편과 결혼해 아들 넷에 딸하나를 낳아 자식들을 가르쳤다.

아들들이 남 부럽지 않게 살라고,

나처럼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게 살라고,

어려운 형편에도 이를 악물고 일해서 학교에 보냈다.

큰아들은 일찌감치 취직을 하여 꼬박꼬박 월급을 보내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둘째 딸도 재봉사로 돈을 벌어 스스로 독립을 했다. 셋째와 넷째도 서울에서 일하며 제 몫을 해냈다. 막내는 끝까지 내 곁에 남아 나와 함께 일하며 공부했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자식들은 내 삶을 지탱해 준 기둥이었다, 남편보다 더 든든했던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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