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아픔을 먼저 해결해 주던 사람
이리역에 출근을 한 남편이 점심때도 안 됐는데 집에 왔다. 시어머니가 놀래서 아들에게 물었다.
'이보시게, 집에 올 시간이 아닌데 어쩐 일인가?'
아들은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면서
'일본 관리 놈이 하도 싸가지가 없이 굴어서 작씬 두드려주고 도망 나왔소.'
'잘했네, 그놈들이 못돼 먹었으니 혼이 나야지.'
아들 앞에서는 두둔하며 잘했다고 하더니
'세상에나! 결혼해서 색시도 생겼으니 참았어야지. 돈벌이는 누가 하라고, 그놈의 성질머리를 다스리지 못하나!'라며 혼잣말로 혀를 끌끌 찬다.
우리 살림은 고작해야 논 한 필지와 밭 삼백 평이었다. 논에서는 벼를 생산해 밥을 해 먹고, 밭에서도 보리농사를 지어 보리밥을 해 먹고살았다. 반찬거리는 텃밭에서 해결했다. 그나마 우리 세 식구는 입에 풀칠은 했다. 전쟁통에 아랫동네 성철이네는 논 한 마지기가 없어서 밥을 굶는 일이 허다했다. 성철이가 남의 집에 일을 나가서 삯으로 쌀가마를 벌어오면 밥을 해 먹었다. 쌀독에 쌀이 떨어지면 굶어서 얼굴이 누렇게 뜨고 부황이 들어 지내기 일쑤였다.
모내기 철이 되어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느라고 시어머니는 새벽부터 논에 나가 일을 한다. 일 나가는 어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은 방구석에서 뒹굴 거린다.
'어머니랑 논에 나가 같이 일해요.'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얼른 밥상을 치우고 나는 시어머니가 일하는 논으로 나가 함께 논일을 했다.
'아들이 같이 일하면 어머니 허리가 덜 아플 텐데요.'
'워낙 약골로 태어나서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만도 고맙다.'
한마디로 내 말을 잘랐다. 어머니가 새벽부터 일 하는데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는 남편은 우리 집 한량이다.
아침밥을 먹고 나니 시어머니가 나를 불러 앉힌다.
'아가, 어젯밤에 내가 뒷산 밤나무 아래에서 크고 실한 밤을 앞치마에 주워 담았단다. 밤이 어찌나 실하던지,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 이게 태몽이 아닌가 싶구나! 너 아직 소식 없니?
'어머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난달까지는 달거리를 했어요.'
'아가, 기다려 보자. 몸 조심하고, 힘든 일은 내가 하마.'
어머니의 태몽 이후로 몸이 나른해지고 잠이 쏟아지며, 친정집에서 엄마가 해주던 고깃국이 생각났다. 그 무렵 나는 첫 아이를 임신했다.
남편은 아침밥을 먹으면 동네로 나갔다. 아랫동네에 사는 성봉이랑 둘도 없는 친구다. 성봉이는 농사일보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벌고 싶어 했다. 둘이 모이면 시골을 떠나 돈벌이 궁리를 했다. 성봉이는 논을 팔아 익산으로 이사를 갔다. 남편은 홀어머니와 갓 시집온 새댁이 있어 훌쩍 떠나지 못했다. 이사 간 성봉이를 늘 그리워했다. 아랫동네뿐 아니라 저너머 동네까지 친구를 찾아다녔다.
첫아들이 태어났다. 남편은 집에서 아이를 안아주기도 하고 집안일을 도왔다. 하지만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자 남편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에는 면사무소에서 무상으로 배부했다며 뽕나무 묘목을 잔뜩 가져왔다. 밭에다 보리를 심는 것보다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를 키워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남편 말을 믿고 너머 밭에다 뽕나무를 심었다.
뽕나무는 봄과 가을에 두 번씩 잎을 수확한다. 봄에는 뽕잎을 싹둑 베어내면 된다. 하지만 가을에는 손으로 하나하나 뽕잎을 따야 한다. 그래야 다음 해 봄에 새순이 난다. 뽕잎을 먹고 자라는 것은 누에다. 남편은 임피장에 가서 누에알을 사 왔다. 뜨듯한 방바닥의 쟁반 위에 누에알을 펼쳐놓았다. 방바닥에서 누에알이 점점 자란다. 처음에는 꾸물꾸물한 것들이 방바닥에 기어 다녀 기겁을 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란다. 뽕잎을 잘게 잘라 누에에게 밥을 준다.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는 점점 커진다. 한잠을 자고, 두잠을 자고, 여섯 잠을 자고 나면 누에는 자기 몸에서 고치를 만든다.
남편과 나는 누에고치를 리어카에 차곡차곡 싣고 임피장으로 갔다. 정부에서 매상을 해 주었다. 첫 수확한 누에고치를 판 돈으로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샀다. 저녁 밥상에 고기반찬으로 온 가족이 포식했다. 더 이상 꾸물거리는 누에도 징그럽지가 않았다. 이것들이 자라서 돈이 된다고 생각하니 누에가 사랑스러웠다. 어느 해인가 누에고치를 팔러 나간 남편이 거금 4만 원을 주고 신일 선풍기를 사 왔다. 동네에서 처음 구경하는 선풍기였다. 여름에는 비료 포대 부채를 사용했는데, 선풍기 바람은 너무 시원하고 신기했다. 선풍기는 농사일에도 사용되었다. 겉보리를 고르는데도 사용하고, 풍구 대신으로 사용했다. 온 가족이 누에를 키워서 고치를 팔아 돈을 버는 일이 행복했다.
남편은 동네에서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 다니더니 면사무소의 신임을 얻어 '구장'이 되었다. 구장은 면사무소에서 시키는 심부름을 대신하고, 세금도 대신 납부해 주고, 동네 사람들 편리를 도와줬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이 착하고 남의 일을 자신의 일보다 더 열심히 해준다고 신뢰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사는 집에서는 편지를 대신 읽어주고 써 주기도 했다. 농사짓는 삯도 계산해 줬다. 구장일은 보면서 남편은 더 바빠졌다.
삼월에 군산에 사는 동생네 집에 갔다.
'성, 형부가 쌀 10 가마 값을 빌려갔는데 어디에 필요한 돈이었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쌀 10 가마나 되는 돈을 나도 모르게 동생한테 빌려서 뭔 짓을 했을까? 생각하니 피가 솟구쳤다. 집에 돌아오니 날이 어둑해져서 남편이 들어왔다.
'동생 집에 가서 돈 빌렸어요?' 얼굴이 벌게져서 남편에게 따져 물었다.
'어찌, 알았는가? 크게 걱정 마소. 곧 갚기로 했으니.'
'그 큰돈을 어디에 썼는지 말해요?'
남편은 쭈삣거리다가 어머니의 재촉하는 시선을 못 이겨서 말한다.
'아랫동네 완순이가 머리가 좋아 대학에 합격했잖아. 그런데 등록금이 없어서 포기한다고 해서 내가 우선 돈을 빌려줬어. 완순이 누나가 곧 갚는다고 했으니 걱정 말어. 머리 좋은 사람은 공부를 계속해야지 돈 없어서 공부를 그만두면 되겠나.'라며 다시는 묻지 말라고 한다. 남의 일에 내 집일처럼 나서서 해결해 주고 다니는 남편이 꼴도 보기 싫었다. 석 달 뒤에 완순이 누나는 남편이 빌려준 등록금을 갚았다. 완순이는 무난히 대학을 졸업하였다. 해마다 명절이면 완순이는 과일을 사들고 집에 찾아왔다. 남편이 은인이라며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이라고 칭찬을 했다.
남편은 성질이 무섭고 까탈스러웠다. 옳다고 생각하면 앞장서고, 불의에 맞서는 사람이었다. 구장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면사무소 일을 보면서 부당함을 참지 못해 대들기 일수였다. 결국에는 구장직을 박탈당했다. 막내아들이 말한 적이 있다. 아들과 친구들은 소나무가 있는 언덕에서 묘똥놀이를 자주 했다. 동네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다가 아이들을 보면 소리를 지르면서 혼을 냈다. 묘똥에 올라가면 묘가 허물어진다고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 남편이 아무리 혼을 내도 아이들은 묘똥놀이를 했다. 멀리서 남편이 보이면 아이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갔다. 아들도 같이 도망갔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무서운 아버지였다.
농촌의 겨울에는 농사일이 끝나서 할 일이 없었다. 동네 남자들은 아랫동네 사랑방에 모였다. 모여서 화투를 하거나 마작을 했다. 처음에는 100원씩 동전내기를 하다가 점점 판이 커져 천 원짜리가 된다. 밤이 깊어지면 쌀가마니가 왔다 갔다 한다. 노름에 빠진 남자들 때문에 집집마다 싸움이 일어났다. 남편은 어디서 배웠는지 마작을 하느라고 밤늦게 오기 일쑤였다. 저녁이 되면 나는 아빠를 찾아오라고 아들을 보냈다. 아랫동네 사랑방에는 담배 연기가 뿌연 하고 동네 남자들이 눈이 씨벌껀해서 마작을 하고 있었다. 어린 아들이 아빠를 불러 밥 먹으러 빨리 가자고 하면 남편은 좀 있다 간다고 하며 아들 손에 동전을 쥐어주면서 빨리 집에 가라고 보냈다.
마작에 미쳐서 밤새 집에 돌아오지 않던 남편이 새벽에 돈을 한 움큼 쥐고 들어왔다.
'내가 돈을 많이 땄어.'라며 내게 돈을 건넸다. 난 그 돈을 방바닥에 뿌려 던져 버렸다.
'당신 같은 사람은 죽어야 할 사람이요.' 막 소리치며 대들었다.
하지만 남편이 되레 소리를 질렀다.
'여편네가 어디 하늘 같은 서방한테 죽으라니? 방송국에 가서 떠들어 대라.' 하면서 화를 냈다. 시어머니와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너무 화나는 겨울밤이었다. 다음 날 남편은 뭘 잘했다고 밥도 먹지 않고 꼼짝 않고 누워만 있다. 하루가 지나고, 삼일째 되는 날에 결국에는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이던 겨울이었다. 시어머니는 밤에 변소에 걸어가다가 넘어졌다. 엉덩이뼈가 부러져서 삼 개월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조선에 없던 귀한 아들을 두고 시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다. 평생 고생했던 어머니를 꽃상여에 태워서 장례를 치렀다. 약골인 아들을 앞 세울까 봐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3년 뒤 어느 날 자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일어나 배를 움켜쥐고 뒹굴었다. 깜짝 놀라서 날이 새기를 기다려 개정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하더니 암인 것 같다며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군산도립병원에 갔다. 역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췌장암이라고 하며 3개월도 못 산다고 했다. 약골이긴 했어도 이렇게 빨리 죽을지는 몰랐다. 하늘이 무너졌다.
백방으로 암에 좋다는 약을 찾아다녔다. 남편과 친구였던 지도소 소장이 아주 용한 약국이 칠보에 있다고 알려줬다. 지옥에라도 가서 약을 지어와서 남편을 살려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침 6시 첫 버스를 타고 익산에서 전주로 가서 칠보에 있는 대전 약국에 도착했다. 돈을 비싸게 주고 용약을 지어왔다. 남편은 삐쩍 마르고 점점 쇠약해져 용약을 먹더니 토하고 입가가 허옇게 부르텄다. 더 이상 비싼 약도 몸에 받지 않았다.
'병근이 엄마, 당신이 고생이 많구려!'
시집와서 평생토록 고생만 시켰던 남편이 죽을 때가 되니 나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했다.
'병원에서 얼마나 더 산다고 합디까?'
병원에서 3개월이라고 선고했다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잘 먹으면 낳는대요. 약 드세요.'라며 위로했다. 남편은 의사가 선고한 삼 개월 보다도 육 개월을 더 살았다. 암이 발견된 지 딱 1년 만에 내 곁을 떠났다. 평생 살면서 돈 한 푼을 벌어다 주지도 못하고 속만 썩이더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반듯하게 살려고 했고, 남의 아픔을 나서서 해결해 주던 사람이었다. 내 생애 남편은 한량이었지만, 사실은 어렵고 힘든 세월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하고, 가족을 지켜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