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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를 시험 보고 들어갔어

파란색과 빨간색 입학 통지서

by 땡자랑

찬 바람이 부는 이월에 나는 엄마 손을 잡고 개정에 있는 국민학교로 걸어갔다. 옆집 사는 순이는 엄마가 동네 구장네 밭일을 나가서 우리랑 함께 갔다. 저만치 앞서서 같은 동네 남자애도 엄마와 걸어간다. 국민학교에서 입학시험을 보는 날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이 되자 '시복이 학교에 보내라.'라고 아버지께 명령하셨다. 그 당시는 여덟 살에 국민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는 별로 없었다. 아홉 살이 되어야 학교에 들어가고 열 살, 열한 살 짜리도 1학년에 입학을 하였다.


운동장에는 입학시험을 보려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남자들이 훨씬 많아 보였다. 순이와 나도 줄을 섰다. 운동장에서 한참을 기다리자 내 이름을 불렀다.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무섭게 생긴 일본인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을 한다. 주먹만 한 시계를 들고 소리 나면 손을 들라고 했다. 왼쪽 귀에서 재깍재깍 소리가 났다. 그다음에는 오른쪽 귀에서 째가 째깍 소리가 났다. 다음으로는 색종이를 펼쳤다. 빨간색, 파란색 색이 참으로 고왔다. 무슨 색인지 말하라고 했다. 빨강, 파랑을 알아맞췄다. 선생님을 연필 세 자루를 들었다. 몇 자루인지 수를 세는 문제이다. 세 자루에 두 자루를 더해 몇 자루인지 말하라라고 했다. 다섯 자루라고 말하자 선생님을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시험이 끝나고 밖에서 기다리는 엄마한테 달려갔다. 학교 밖으로 나갈 때까지 시험 본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엄마, 시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을 들었어. 색종이 색깔을 말하고, 연필이 몇 자루인지 알아맞추는 문제야. 선생님이 무섭게 생겨서 떨렸지. 문제는 너무 쉬웠어.'

'우리 딸 삼월이 되면 학교에 가겄네.'

엄마는 웃으면서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한참을 기다리니까 순이가 얼굴이 벌개서 나왔다. 엄마 뒤를 따르며 순이는 말했다.

'선생님이 너무 무서웠어. 시계 소리에 손을 들라고 했는데 잘 안 들려서 맞추지 못했어.'

'그럼 색종이 색깔은 맞추었어?'

'빨간색, 파란색 색종이는 말했어. 다음에 연필을 들고 뭐라고 하는지 몰라서 연필이라고만 했어.'

순이는 나보다 한 살을 더 먹었다. 올해도 집에서 일도 하고 동생도 돌보라고 했는데, 나랑 같이 학교에 가겠다고 떼를 쓰고 울면서 우겨서 시험을 보러 온 것이다. 순이랑 학교에 같이 다니고 싶은데 순이가 숫자 셈을 아직 못한다.


일주일 뒤 동네 구장이 국민학교에서 준 봉투를 들고 왔다.

'시복아, 학교에서 통지 왔다.'

입학시험 결과 통지다. 할아버지는 봉투 안에서 파란색의 합격 통지서를 꺼냈다. 난 너무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시복이 올해 학교에 들어가겠네.'라며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셨다.

'순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구장에게 물었다. 궁금하면 순이네 집에 같이 가자고 한다. 순이는 소죽을 끓이는 엄마 옆에서 놀고 있었다. 구장이 학교 봉투를 주었다. 하얀 봉투 안에서 빨간색 통지서가 나왔다. 순이는 얼굴이 퍼레졌다. 구장은 이미 순이네 집을 나가고 없었다. 순이는 국민학교 시험에 떨어졌다. 순이가 울길래 나도 따라 울었다.


삼월이 되어 국민학교 입학식을 하는 날이다. 엄마 손을 붙잡고 옆집 순이랑 같이 학교에 갔다. 할아버지가 사친회 회장이어서 빽을 서서 순이를 학교에 들어가게 해 주었다. 운동장에는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 들어가니 다섯 줄로 책상이 놓여 있었다. 한 줄에 16명씩 전체 80명으로 교실에 가득 찼다. 아홉 살인 나보다 어린아이는 별로 보이지 않고 다들 나이가 더 먹은 남자애들이다. 여자가 16명이고 나머지 64명이 남자였다.


선생님은 조선 선생과 일본 선생이 같이 있었다. 조선 선생은 우리말을 가르쳤다. 일본 선생은 고학년을 맡았다. 4학년이 되자 우리말은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일본에 대한 공부만 했다. 일본 사무라이 역사를 선생님이 신이 나서 가르쳤다. 주로 전쟁에서 이긴 이야기를 했다.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가끔은 신라와 고려 역사를 가르쳤다. 우리나라 역사는 재미있었다.


3학년부터 산수 시간에는 분수를 가르쳤다. 나는 산수를 잘해서 산수 시간이 제일 좋았다. 시험을 보면 산수 점수는 10등 안에 들었다. 동생은 산수를 못해서 학교 끝나면 항상 나에게 물었다.

'성, 약분이 뭐야? 어떻게 계산해."

'약분은 작은 수를 가지고 큰 수를 나누면 돼.'

동생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나누기를 어떻게 해?'

분모와 분자를 가지고 나누면 약분이 되는데 동생은 알아듣지 못했다. 산수는 못해도 동생은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우리 성은 산수를 잘하네. 그래서 상장도 타왔네.' 자랑하면서 나를 따라다녔다.


4학년에서 5학년으로 진급을 하려면 시험을 봤다. 시험에서 낙제를 하면 진급을 못했다. 우리 반에서는 2명이 낙제를 했다. 개정에 사는 부잣집 아들과 아래 동네에 사는 채가 아들이 낙제를 했다. 둘은 4학년을 다시 다녀야 했다. 다행스럽게 순이는 진급을 했다.


우리 집은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둔 사정리 부잣집이다. 엄마는 첫째로 딸을 낳았고, 둘째도 딸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빠한테 둘째 부인을 맞이하라고 했다. 둘째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아버지는 두 집 살림을 하느라고 바빴다. 나는 동생들이 많아서 할 일이 많았다. 다섯째 막내딸은 내가 많이 엎어 줬다. 여섯 번째 아들은 엄마 차지였다. 외아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받았고, 엄마도 애지중지 키웠다. 덕분에 집안일은 큰딸인 내가 많이 했다. 청소며, 빨래하는 것, 밥 하는 것까지 돕느라고 항상 나도 바빴다.


농번기가 되면 아이들은 집안일을 하느라고 결석을 많이 했다. 순이도 농번기가 되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일을 했다. 열흘도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순이는 동생을 업고 청소며 빨래며 집안일을 했다. 순이 엄마는 동네 논일과 밭일을 나가느라 집안일은 순이가 했다. 나는 4학년이 될 때까지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4학년 때 눈에 다래끼가 나서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하루를 빠지고 학교에 나가니 결석한 날 공부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만 잘 들으면 공부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년제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4년제 고등학교에 간다. 여학교를 졸업하면 학교 선생으로 일할 수 있다. 나도 여학교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집안일을 돌보라고 했다. 그래서 국민학교만 다닐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공부는 안 했다. 당시 여학교 월사금이 10원이었다. 쌀 대되 한말이 5원이니까 두말 값이다. 월사금뿐만 아니라 책값이며 잉크 값이며 소소하게 돈이 필요했다.


우리 집 살림은 할아버지가 주관하고 있었다. 막내 고모는 나보다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미제 고모라고 불리는 막내 고모는 여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 갔다 오면 '에이, 비, 시, 디, 이, 에프, 지.'를 소리 내서 외웠다. 미제 고모가 영어 공부를 하면 나도 따라 외웠다. 쓸 줄을 모르지만 에이, 비, 시디를 따라 외웠다. 미제 고모는 여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학교 선생으로 일했다.


열여섯 살이 되자 동네 모내기 조합에 나갔다. 논에다 모를 심으려면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조합을 만들어 모를 심는다. 엄마는 집안일이 바빠서 우리 집에서는 모심으러 나갈 사람이 없었다. 한 집에 한 사람씩 모를 심으러 나오지 않으면 조합에서 모를 심어주지 않았다. 순이와 나는 모를 심으러 나갔다.


'애기가 모를 심으러 나왔네.'라며 동네 아줌마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도 모를 심는 법을 가르쳐 줬다. 구장과 박 씨 아저씨가 모줄을 잡고, 우리는 옆으로 줄을 맞추어 섰다. 적당한 간격으로 열개 정도 심을 만큼 자리를 벌려서 선다. 옆집 사는 이 씨 아줌마는 내가 어리다고 다섯 칸만 주었다. 순이는 작년부터 모를 심어 봤기 때문에 열 칸을 주었다. 구장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줄을 떼면 아줌마들이 엎드려 모를 심는다. 왼손에 모를 쥐고 두세 개씩 띠어서 한 칸 한 칸 조심스레 심었다. 다섯 칸을 심지도 못했는데 호루라기가 울렸다. 남은 칸은 옆집 아줌마가 얼른 채웠다.


처음에 어설펐지만 서너 줄이 지나니까 아줌마들 속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호루라기에 맞추어 엎드려서 모를 심고 일어났다. 점점 허리가 아파왔다. 기다란 논은 파랗게 모를 심은 논보다, 허옇게 물이 차서 모 심기를 기다리는 논이 많이 남았다. 종아리가 따끔하여 만져보니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다. 기겁을 하니 순이가 다가와서 거머리를 떼어 주었다. 시뻘건 피가 나왔다. 허리 아픈 것보다 거머리가 더 무서웠다. 논을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무서웠다.

'열여섯이나 되었으니, 모심기는 시복이가 해라.' 명령하신 할아버지가 무서워 꾹 참고 모를 심었다. 세참으로 나온 막걸리를 쭉 들이켜는 옆집 아줌마를 보며 절로 침이 넘어갔다. 막걸리 대신에 고구마를 달게 먹었다. 모심기에 동원된 날을 초저녁부터 쓰려져 잠이 들었다.


국민학교 입학시험을 한 번에 통과했고, 국민학교에서 한 번도 낙제하지 않고 진급을 했다.

잠깐 과거로 돌아가 '인생이 달라졌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할아버지가 '딸은 국민학교만 가르치면 된다.'는 고정관념이 없었다면 달라졌을까?

미제 고모랑 같이 여고에 다니겠다고 떼를 쓰고 우겼다면 달라졌을까?

여고를 졸업하여 국민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더라면 달라졌을까?

하지만 여고에 보내지 않고 집안일을 시켰다고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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