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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연을 맺다-며느리 넷에 사위

며느리는 딸처럼, 사위는 아들처럼 대했다.

by 땡자랑

며느리 넷에 사위 한 명.

자식들로 인해 새롭게 맺은 인연들이 내 삶을 풍성하게 채워 주었다.


주말이면 오병이와 막내며느리가 어김없이 찾아온다. 새벽부터 나는 텃밭에서 부추를 베고, 상추를 솎아서 다듬고, 꽈리고추도 한 바구니 따 담았다. 애호박도 따고, 오병이가 좋아하는 호박잎도 따다 놓았다. 막내네는 둘 다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끼니를 어떻게 챙겨 먹는지 항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오후 네 시경에 막내 차가 마당에 들어오고, 며느리가 밝게 웃으며 내린다.

'어머니 잘 계셨어요?'

'어서들 오너라! 방에 들어가 밥 먹자.'


아침부터 막내아들네와 함께 먹을 저녁 반찬을 준비했다. 돼지고기를 넣고 김칫국을 끓였다. 쌀은 진즉에 불려서 밥솥에 안쳤다. 텃밭에서 푸성가리를 다듬어서 파나물, 머위나물 등 반찬을 만들었다. 며느리는 얼른 부엌으로 들어와 상을 차린다. 장아찌 반찬하고 새로 무친 나물 반찬을 상에 올리니 저녁 상이 푸짐해졌다.

'아들, 배고프지. 얼른 밥 먹자.'

나는 막내 네와 함께하는 주말 저녁을 일주일 내내 기다린다. 손자들이 다 커서 이제는 서수에서 혼자 살고 있다. 이곳에서는 텃밭을 가꾸고, 동네 노인정에 마실을 다닌다. 그리고 명절마다 서울에서 아들들이 내려올 것을 생각하면 든든하다. 특히 막내가 가까이 살고 있어 주말마다 와 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첫째 며느리는 이웃 동네에 사는 보천 아재가 중매를 했다. 색시는 스무세 살로 키도 크고 얼굴도 이뻤다. 서른이 넘도록 결혼 이야기를 하지 않던 아들이 맞선을 보더니 '결혼을 하겠다.'라고 하니 너무 기뻤다. 일병이는 결혼식만 올리고 직장이 있는 울산으로 떠나고 며느리는 서수에서 같이 살았다. 시아버지는 고지식해서 '며느리도 한솥밥을 먹어야 식구가 된다.'며 새댁을 시집에서 살게 했다. 하지만 어린 며느리는 집안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친정아버지가 국민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해서 농사일에는 잼병이다. 그런대로 밭일은 나를 따라다니며 풀 뽑기는 해 보는데, 논일은 아예 못했다. 며느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일요일이 되면 빠지지 않고 서수에 있는 교회에 갔다. 남편은 교회 다니는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서수에서 같이 산지 한 달이 지나자 남편이 며느리를 불러 꾸짖었다.

'시집왔으면 시댁 법도를 따라야 한다. 이제부터 교회에 가지 말아라.'

며느리는 눈물을 참으며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니 아버지 병이 깊어져서 어찌 될지 모르니, 일단 말이라도 알겠다고 해라.'라며 부탁했다. 하지만 며느리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남편이 죽고 봄이 되자 나는 며느리를 큰 아들이 사는 울산으로 보냈다.


큰 며느리가 첫째 딸과 둘째 딸을 낳았다. 나는 아들 손자를 꼭 낳아 주기를 원했다. 며느리가 셋째를 임신하자 딸인지 아들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며느리 산달이 가까이 되어 밭에 나가 풀을 메고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개똥이네가 서둘러 마당으로 들어온다.

'형님, 왜 전화를 안 받았어요? 일병이가 아들을 낳았대요.'

나는 마루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세상에나 좋아라! 드디어 우리 큰 아들이 아들 손자를 낳았네.' 그날의 기쁨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좋았다.


외동딸은 구로 공단에서 만난 친구가 중매를 했다. 명절에 서수에 내려온 이옥이는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난 딸이 너무 멀리 시집을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옥이는 고흥 서방하고 결혼을 했다. 사위는 활달하고 인물도 좋았다. 처음에 고흥에서 고물 장수를 했다. 고철이랑 고무 다라이 등을 팔았다. 수완이 좋아 먹고사는데 어려움이 없이 돈을 벌었다. 이옥이도 사내대장부 같이 일을 후다닥 잘했다. 둘이 똘똘 뭉쳐 장사를 키우더니 고흥을 떠나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사위는 서울에서 성공해서 딸을 호강시켜 주겠다고 허풍을 떨었다. 한창 사업이 잘 될 때는 우이동에 3층짜리 빌라에서 산 적도 있다. 우이동 빌라에 가보니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부잣집 안방마님처럼 호화롭게 살고 있었다. 멀리 시집간다고 서운해했던 딸은 부자로 잘 살고 있었다.


둘째 며느리는 충청도에 사는 고모가 중매를 했다. 삼병이가 서른이 되어서 마침 결혼할 상대를 찾고 있었다. 삼병이는 선을 보고 와서 '좋다, 싫다.' 말이 없었다. 고모가 '색시가 어떠냐?'라고 물어도 아무 말이 없다. '싫다고만 안 하면 돼. 처음 만나서 좋으면 뭐가 얼매나 좋겠어?' 우리는 서둘러서 삼병이를 장가를 보내기로 했다.


결혼식 날에 옆집에 사는 철봉이가 '색시가 안 이쁘네.'라고 솔직하게 말했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예쁘면 뭐 하냐. 살림 잘하고 정 붙여 살면 그게 복이지.' 정말로 둘째 며느리는 얌전하고 살림을 야무지게 잘했다. 아들 직장이 정읍이라서 신혼살림을 그곳에서 시작했다. 그 뒤에 둘째 며느리는 첫아이를 낳고 내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큰아들이 딸만 둘이라 아들을 기다리던 차에 둘째가 먼저 아들을 낳으니 고맙고 든든했다. 며느리는 아이가 기어 다닐 때까지 서수에서 나랑 같이 살다가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셋째 며느리는 큰 며느리가 다니는 교회의 구역 자매였다. 큰 며느리는 교회에서 똑똑하고 상냥한 아가씨를 셋째 색시감으로 눈여겨봤었다. 당시 사병이는 큰 아들네 집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큰 며느리가 아가씨를 소개하니 사병이는 그다지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사병이는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서울에 사는 큰 형이 결혼 준비를 다해서 내가 사병이 결혼식에 한일은 별로 없었다.


사병이나 셋째 며느리나 건강하니 열심히 벌면 잘 살겠거니 생각했다. 사병이네는 신혼생활을 지하 방에서 시작했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지하방에 전세를 사는 사병이가 안타까웠지만, 지상으로 이사하라고 보태줄 돈이 없었다. 둘 다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었다. 첫 애를 낳고 빽빽거리며 아이가 운다고 주인집이 방을 비우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방을 빼서 오 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에 전세를 들어갔다. 오 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야 하는 집이다. 한 번은 사병이네 5층까지 올라가는데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을 쉬면서 올라갔다. 그날 나는 사병이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사병아, 넌 각시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각시 하자는 대로 하면 굶을 때는 죽이라도 얻어먹고, 죽을 먹을 때는 밥을 먹게 될 것이다. 그러니 각시랑 정신 차려 살림을 하거라.'


어릴 적부터 사병이는 용해 빠져서 친구한테 불알이라도 떼어줄 만큼 속이 없는 애였다. 며느리는 큰딸로 싹싹하면서도 성깔도 있어서 용해 빠진 사병이와 함께 서울 살이를 잘 견뎌냈다.

딸 손녀만 둘을 낳은 셋째 며느리한테 전화가 왔다.

'어머니, 딸 둘만 낳고 그만 낳으려고 했는데 임신이 되었어요. 셋째가 아들인지 딸인지 답답하니 점쟁이한테 물어봐 주세요.'

난 구암동에 있는 점쟁이한테 갔다. 점쟁이는 이번에는 틀림없는 아들이라고 꼭 낳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셋째도 아들 손자를 낳았다.


막내는 대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취직을 했다. 홀로 있는 나를 두고 서울로 가기 싫다면서 군산에 있는 화학공장에 직장을 얻었다. 대학 졸업하고 몇 년간 돈을 벌어 장가를 갔으면 했다. 그런 막내가 추석에 결혼할 여자가 있다며 집에 데려왔다.

오병이가 여자를 데려오는 날 나는 남동생 댁과 군산에 사는 동생을 불러 막내 며느리될 아가씨를 선을 보게 했다. 예비 막내며느리는 자그마하니 깜찍하고 예뻤다. 선생으로 교편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교양이 있어 보였다.

남동생 댁이 소곤거린다.

'형님, 키가 좀 서운하네, 나중에 손자들도 엄마 키를 닮을까 봐 그것이 걸리네요.'

군산 동생이 대뜸 받아친다.

'성, 키가 밥 먹여주는 것 아니니까 혼인을 시켜, 선생이면 둘이 벌어서 잘 살 수 있어.'

둘은 예비 막내며느리를 결혼 상대로 합격이라면서 결혼을 시키라고 한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 되었다. 사정리에 사는 남동생 댁이 홍어 두 박스를 사 왔다. 한 마리는 처가 댁에 이바지로 보내고 한 마리는 홍어회를 무쳤다. 찹쌀로 한과도 미리 만들어 놓았다. 찰떡도 시루에 찌었다. 군산에서 제일 좋은 '영빈관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다. 오병이 친구들이 식장을 꽉 채웠다. 나도 이번 혼사가 마지막이니 성대하게 결혼식을 준비했다. 동네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고 친척들도 다 모였다. 이처럼 기분 좋은 날이 없었다. 막내까지 짝을 찾아 결혼을 하니 내가 할 일을 다 한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먼저 간 남편 사진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여보, 이제 나는 할 일을 다 했소! 당신도 막내 결혼식에 함께 했으면 참으로 좋아했을 거예요.'라며 하늘로 먼저 떠난 남편에게 결혼 소식을 전했다.


아들 넷에 딸 하나가 제각기 짝을 찾아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아들들이 새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니 그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었다. 나는 며느리도 딸처럼 귀하게 여겼다. 우리 집에 인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자식들에게 늘 말했다.

'집안일은 부부가 서로 도와가며 해야 한다.'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주말마다 집에 오는 막내며느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는 참으로 현명하세요. 평생 자식들을 챙기시고, 서수 텃밭에서 일해 제철 야채를 항상 보내주셨어요. 명절이 되면 서울 사는 아들들에게 말린 야채들, 간장, 된장, 고추장과 참기름과 들기름 등을 보따리로 보냈어요. 평생 그렇게 사랑으로 우리를 키워주셨어요.'

나는 지금도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다. 그래서 오래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내 삶을 가득 채워준 것은 며느리 넷과 사위 하나, 그리고 내 자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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