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환상의 디즈니

by 머머씨

어릴 적 나에게 이모네 집은 환상의 디즈니였다.


투박한 시골 고모나 꾸밈을 몰랐던 우리 엄마와 달리, 이모는 마른 몸매에 세련된 옷, 전지현 뺨치는 검은 긴 생머리를 찰랑이던 멋쟁이 누구나 동경할 만한 연예인 같았다. 그리고 이모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촌스러운 시골 쥐에서 우아한 공주님으로 신분 상승을 했다.


원래 우리 집과 이모네는 고작 반 정거장 거리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혼 후 내가 시골 고모댁으로 보내지면서 그 거리는 버스 정거장 10개보다 훨씬 더 아득해졌다. 이모 집에 가려면 비포장도로를 20분이나 걸어 나가 활주로라 불리던 휑한 대로변까지 가야 했다. 아이들이 지어낸 별명이 아닌 인근 비행장 때문에 유사시엔 진짜 전투기가 뜨고 내린다는 진짜 전설의 비상 활주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올라탄 20번 시내버스


덜컹거리는 차창 밖으로 논밭이 사라지고 3층의 회색 건물들이 속속들이 나타나면 내 심장은 콩닥거렸다. 그리고 버스 문이 열리고 확 끼쳐오던 매캐한 매연 냄새. 아이러니하게도 그 냄새가 시골 쥐에게는 도시 입성을 알리는 향수였다.


이모 집 현관을 열면 진한 화장품과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그건 마치 성공한 어른 여자의 냄새 같았다. 무남독녀인 사촌 언니의 거실은 곧장 우리의 런웨이가 됐다. 변신의 핵심은 욕실에서 가장 긴 수건. 그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머리띠를 탁! 끼우면 라푼젤 완성. 이모의 원피스를 질질 끌며 거울을 보면 우린 꺄르르 웃음이 터졌다.


아마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금강산도 식후경. 공주 놀이로 배가 꺼지면 도시의 맛을 즐길 차례였다. 시골 고모네는 배달 자체가 안 되는 지역이었지만 이곳은 전화기 다이얼만 돌리면 "짜장면 시키신 분!" 하며 철가방이 날아오는 문명의 최전선. 입가에 짜장소스를 잔뜩 묻히고 먹어도 걱정 없었다. 그릇만 내놓으면 다음 날 이모가 외상값을 해결해 주셨으니까. 그 쿨한 후불 결제 시스템이 어린 눈엔 얼마나 풍요로워 보였는지 모른다.


물맛조차 달랐다. 으레 마시던 스댕 막대접 대신 크리스탈 유리컵에 물을 꼴꼴 담아 마셨다. 묵직한 컵을 부딪치며 "짠!" 하면 맹물에서도 와인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언니와 나는 부르면 전자 올겐을 치거나 비디오를 켰다. 언니의 최애 만화는 <꼬마 고인돌 빠삐코> "빠~빠~빠, 삐~삐~삐, 꼬~꼬~꼬!" 주제가를 목청껏 부르며 "고릴라 친구도 있었다니까~" 가사 하나에 자지러지던 그 한가로운 오후.


하지만 시건은 그놈의 부의 상징 때문에 터졌다.


주방에 있던 요람형 생수 거치대. 쇳덩이 그네 위에 20리터 물통을 얹어둔 그 것이 문제였다. 우린 냉장고에 빈 물통을 호기롭게 리필을 시도하다 그만 쏟아버렸다. 바닥은 순식간에 물바다. 우리는 혼날까 봐 낑낑대며 그 큰 통에 수돗물을 채워 완전범죄를 꿈꿨다.


하지만 범죄는 퇴근한 이모부가 물을 마시자마자 발각됐다.


아이스크림 회사에 다니던 경상도 사나이 이모부는 호랑이보다 무서웠다. 그날 우리는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혼이 났다. 물 때문이 아니었다. 빤한 거짓말을 한 죄. 눈물 콧물 쏙 빼고 나면 어느새 이모부는 무심하게 치킨을 시켜주셨다. 그때 나던 은은한 아저씨 스킨 알콜 냄새와 치킨의 기름냄새. 무뚝뚝하지만 속 정 깊은 가장의 냄새였다.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며 이모 내외 두 분의 인연도 끝이 났고, 나의 디즈니랜드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모부는 여전히 그 집을 지키고 계신다. 가끔 그 앞을 지날 때면 겁 없이 수돗물을 채우며 두근거렸던 맹랑한 그 시절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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