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양품점을 하던 시절
우리집 단칸방에 드디어 비디오 플레이어가 입성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나에게 허락된 비디오는 기계 살 때 끼워준 사은품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뿐이었다. (아닌가. 알라딘인가? 지니 나오고 양탄자 타는 거였는데 제목도 헷갈린다)
보고 또 보고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어느 날 아빠는 구세주처럼 등판했다.
"비디오 빌리러 가자"
동네 비디오 가게. 특유의 쿰쿰한 먼지 냄새가 뒤섞인 그곳은 나에게 천국이었고 아빠는 세상 인자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딱 하나만 골라"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선 전쟁이 시작됐다. 후뢰시맨이냐 마스크맨이냐. 이건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보다 더 심각한 내 인생 최대의 난제. 손을 벌벌 떨며 신중하게 정말 소중하게 마스크맨 1편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계산대 옆 아빠를 본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빠의 스케일은 차원이 달랐고 나는 그날 진정한 어른의 쇼핑을 목격했다.
그렇다. 아빠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중국 드라마 반영자 주연의 일대여황(측천무후)를 시리즈째 쓸어 담으신 거다. 아빠는 검은 비닐봉지가 터질 듯 담긴 비디오를 들고 가게를 나섰고 나는 소중한 1개를 가슴에 품고 아빠 옆을 쫄래쫄래 쫓았다.
나는 후뢰시맨이 변신하는 것만 보다가 밤이 늦어서 멈췄지만 아빠는 티비앞을 점령하고는 밤새도록 무미랑 언니의 암투를 즐기셨다.
'아 이것이 자본주의의 쓴맛인가'
돈 낸 사람 마음대로인 더러운 세상. 나는 1개 빌려주고 본인은 10개 빌리는 저 당당한 내수 차별 속상했지만 그래도 아빠는 나보다 10배는 더 즐거우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