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 없는 어둠 속에서
요즘은 죄책감보다 기록이 더 무섭다.
그 생각은 '약한영웅'이라는 웹툰을 보다가 들었다.
셔틀로 괴롭힘을 당했던 서브 주인공들이
으슥한 골목에서 학폭을 당했던 장면을 회상하던 컷이었다.
"골목길에 가로등 하나가 생겼는데 일진들이 사라졌어"
그저 어둠 속에 빛 하나가 들어온 것뿐인데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졌다.
그건 아마도
골목이 밝아져서가 아니라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멈추게 하는 건 양심이 아니라 시선이라는 말
이제는 낯설지 않다.
예전엔 사람의 눈이 사람을 멈추게 했다.
깜빡이고, 잊히고, 지나갈 수 있었던.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계는 눈을 감지 않기 때문이다.
렌즈는 한 번 본 걸 놓치지 않는다.
내 차 안에도 블랙박스가 있다.
한 번은 퇴근길, 신호 대기 중에 뒤에서 차를 들이받혔다.
다음날 사고 처리를 위해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보는데
어제, 차 안에서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었다.
음정도 박자도 무시하며 엉망진창 부른 노래
아무 말 대잔치처럼 중얼거리던 혼잣말
내가 아무도 안 볼 거라 생각했던 순간들이
모두 저장되어 있었다.
카드 태그, CCTV, 휴대폰.
우리는 매일 무언가에 조용히 흔적을 남긴다.
교통카드, 회사 출입카드, 사방에 널린 캠,
울먹인 셀카, 재미로 찍은 엽기사진,
부끄러운 검색기록까지.
생각날 때 지울 수는 있다.
이상하게도 디지털 흔적은 지워도 불안이 남는다.
렌즈들의 차가운 눈동자는
우리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
한 번은 마트에서 사과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찍힌 사과.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냥 두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천장 위 CCTV의 검은 반구를 발견하고는
얼른 그걸 주워 올렸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기계가 나를 더 잘 아는 세상이 온 걸까.
이상하게도 그게 불쾌한데도 어느 순간부터는 당연해졌다.
사람들은 가끔,
양심 때문이 아니라
기록이 남을까 봐 멈춘다.
요즘은 처벌보다 노출이 더 무섭고
착한 일조차 연기처럼 보일까 봐 조심스럽다.
연출은 습관이 되고 진심은 점점 구차해진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동안
정작 중요한 건 놓치고 있다.
이따금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세상의 모든 시선이 꺼지고,
이름도 얼굴도 지워지고,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때 나는 무엇을 할까.
어떻게 변할까.
모든 시선이 꺼진 그 자리에
과연 어떤 내가 남아 있을까
내가 괜찮은 사람이길 바란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보이길'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혼자 남겨졌을 때
내 안의 진짜 목소리는 뭐라고 말할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긴다는 진리.
그 그림자가 진짜 내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꽤 불편하다.
불편하고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진실.
누가 보든 안 보든
이제는 그림자조차 편집할 수 있는 시대.
그래서 나도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중립기어에 머무는 게 요즘의 조용한 생존 방식이다.
그렇게 감정도, 언젠가 하나의 표정처럼 굳어버릴까 봐
점점 나 자신이 낯설어진다.
어쩌면 가장 강력한 시선은
매일 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내 눈빛일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고 혼자 있을 때
그제야 비로소 마주하는 얼굴.
낯선 건 내 얼굴이 아니다.
진심 없는 표정이 익숙해진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