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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호 Jan 04. 2017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리츠 칼튼 호텔 체인을 창업한 세자르 리츠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상당히 다르다.

리츠 칼튼 아부다비 그랜드 캐널

실제로 세자르 리츠는 귀족과 왕족들을 손님으로 모셨다. 일단 진짜 “왕”을 손님으로 모시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왕처럼 돈을 많이 쓰는 사람은 왕으로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으로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즉, 아무나 왕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왕처럼 돈을 많이 쓰면서도 왕처럼 대접받지 못하는 귀족들에게, 우리는 당신이 왕처럼 돈을 많이 쓰면 왕하고 다를 바 없이 대접하겠다는 의미로 저 말을 남긴 것이다. 기존의 신분제를 무력화시키고, 치르는 가격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시장 마인드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게 거꾸로 전달이 되었다.


몇몇 기업들이 자신들의 서비스 정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고객은 왕이다”라는 모토를 남용하면서, 이제는 매장에서 손님들을 손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고객님이라는 출처 모를 단어를 사용한다. 그것도 고객 뉨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말꼬리 올림 발성법으로 말이다.


거기다가 경어체를 극단적으로 사용하면서 듣는 주체인 손님을 높이는 것을 넘어 그 손님 주변의 모든 것을 높이는 말을 사용한다.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 말은 커피를 존대하는 것이지 듣는 손님을 존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이는, 매장 알바들의 시급보다 비싼 커피이니 알바들이 커피를 존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는 자조 섞인 비아냥도 나오게 된다.


모든 콜센터의 직원들은 손님들, 아니 그중에 질이 나쁜 블랙컨슈머들을 상대로 감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기업은 그 소비되는 감정에는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이들에게 최대한의 “고객은 왕이다” 정신을 요구하는 중이다.


가장 끔찍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진다.


소비자들이 진짜로 자신들이 왕인 걸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세자르 리츠는 분명히 말했다. 왕처럼 돈을 쓰는 손님만 왕으로 대접받는 거라고. 절대 모든 고객이, 모든 소비자가 왕이 아니다. 착각이다. 아주 잘못된 발상이다. 우리는 엄청난 피를 쏟아가며 왕좌에서 왕을 끌어내리는 혁명을 통해 왕을 모시고 사는 왕정시대를 극복하고 민주공화정의 시대에 돌입했다. 물론 우린 왕을 죽이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남의 도움으로 얼결에 그 시대를 넘어오긴 했지만, 우리 선조들 역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이하면서 무수히 많은 토론과 투쟁을 겪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다시 왕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그것도 겨우 껌 한통 사는 소비자의 권능으로?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이건 매출을 올리려는 기업의 광고가 무리하게 차용한 개념이 당신들의 머릿속에 박혀 버린 결과일 뿐이다. 마트에서 이천 원짜리 상품을 사는 당신은 왕이 아니다. 백화점에서 맘먹고 옷 한 벌 구입한다고 해서 왕이 되는 게 아니다. 커피숍에서 카푸치노 한 잔 마신다고 해서 왕이 되는 권리가 따라오지 않는다.


그저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 하에서 상품 및 재화의 공급자와 대등한 계약관계를 형성하는 동등한 자격의 소비자가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측면은, 당신은 언제나 소비자이면서 돌아서면 공급자가 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당신이 소비자의 권리로 왕질을 많이 하게 되면 공급자, 즉 임금노동자의 신분으로 돌아서는 순간 그 왕질을 고대로 당하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제 상거래 시장을 넘어 대중예술, 엔터테인먼트의 시장에까지 퍼져 나간다.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고, 노래와 음악을 만들고, 연기를 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역시 대중에게 컨텐츠를 공급하는 사람들이다. 이 컨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이 자신들이 왕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 걸까?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여배우에게 짝다리 짚었다고 단체로 달려들어 비난을 퍼붓는 기형적이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티셔츠를 인증했다고 일자리를 끊어 버리는 마녀사냥을 하게 된다.


왜? 자기들은 왕이고, 자기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아랫것들을 용납할 수 없으니까.


더욱 비열하고 추잡한 일이 뭔지 아시는가? 똑같이 왕질을 하려고 해도, 공급자가 나이 든 남자이며 유명세가 있는, 즉 사회적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런 왕질의 욕구 자체를 못 느낀다는 거다. 상대가 약자일 경우, 여성이며 연소자이며 관록이 아직 생기지 않은 신인일 경우 더 거세게 나서서 왕질을 한다.


쉽게 말해 이경규가 카메라 앞에서 누워서 뒹굴 거리면 재미있다고 박수를 치고, 설리가 노브라로 셀카를 올리면 버릇없다고 비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얼마나 비열한 짓인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지 모르겠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분명히 성차별과도 연관이 있다. 그 부분은 페미니즘 운동하시는 분들께서 충분히 지적하실 것이며, 나는 그 지적에 동의하며 지지한다는 점을 밝힌다. 그리고 난 똑같은 사건에서 다른 점을 지적한다.


평소에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는 착취 구조하에서 너무 많이 시달린 결과 자신들의 억눌린 공격 본능을 잘못된 마케팅 개념인 “소비자는 왕이다”에 실어 그야말로 개념 없이 집단 마녀사냥을 하고 있는 걸로 본다는 얘기다. 정말로 불행한 것은 그렇게 마녀사냥에 합세하던 대중의 일원들은 당장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또 다른 종류의 갑질에 하루 종일 시달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욱 그런 것이다. 사회 전반이 서로에게 감정적인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구조로 짜여진 이 세태, 이 시스템이 유죄다. 그러니 백화점에서 고객들에게 하루 종일 시달리는 매장 근무 직원들에게 매니저라는 사람이 내놓은 해법이, 근무가 끝나고 나서 다른 백화점에 가서 다른 매장 직원에게 갑질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오라는 것이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으니 뭐 말 다 했을 정도이다. 세상 살기 참 어렵다.


해법은 단 하나, 아주 단순한 방법뿐이다.


상대와 내가 동등한 하나의 인격체라는 점을 그야말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행동의 최우선 원칙으로 새겨 두는 길이다. 내가 상대에게 하는 행동은 반드시 나에게 똑같이 돌아온다는 것, 그러니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절대로 상대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 고대 이스라엘의 랍비 힐렐이 말한 “힐렐의 황금률”이다.


이 황금률의 원칙은 어떤 시대에는 똘레랑스로, 어떤 시대에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으로, 어떤 시대에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어떤 시대에는 자본 계약의 대등함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문명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이 원칙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동등한 구성원이며 민주공화국의 대등한 유권자 시민이라는 점,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특히 약자를 상대할 때 더욱 그래야 한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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