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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호 Jan 09. 2017

18원 후원금은 표현의 자유인가



초기에는 아주 소수의 지지자들이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정치인에게 계좌이체로 18원의 후원금을 보내는 것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러더니 국정조사 국면에서 자꾸 청문회를 방해하는 여당 의원을 상대로 상당히 규모 있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후원금 18원을 보내거나 문자로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이다. 후원금을 보내면 의원실에서는 아무래도 이에 대응하는 업무(영수증 발행 등)를 해야 되기 때문에 서너 명이 이런 행위를 한다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 숫자가 수백수천수만까지 올라가게 되면 의원실 업무 마비의 효과가 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문자메시지를 서너 명이 보내면 그냥 피식 웃고 지워버릴 수 있지만 수천수만 개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오면 전화기를 못 쓰게 된다. 사람들과 연락하고 통화하는 게 주 업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치인의 경우 마비된 전화기는 활동의 마비를 상징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급하게 새 번호 새 전화기를 마련해도 연락처를 알리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모될 정도로 부담이 된다.

이런 행위가 표현의 자유, 혹은 참정권으로 옹호될 수 있는 행동일까? 생각해 보기로 하자.

표현의 자유의 정의가 무엇일까? 우리 헌법에는 표현의 자유가 직접 선언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통신 비밀 보장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선언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거기에 학문 예술의 자유, 저작권 보호에 관한 내용 등을 명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포괄적인 표현의 자유를 간접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한 다리 건너는 내용 말고 좀 더 직접적인 내용을 보자면 세계 인권 선언이 있다. 세계 인권 선언 제19조에 보면 사람은 누구나 의견 및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이거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지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무척이나 놀라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계속 설명을 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시라. 이거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인가? 얼핏 그렇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화라는 것의 양방향성을 고려할 때, 그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 상대의 입장은 어떨까?

상대가 듣길 원할 때 설명을 해야 한다. 지금 출근해야 하는 사람을 붙잡고 설명을 하고 있으면 처음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조만간 그만 좀 하라는 호통을 듣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대화, 메시지, 글, 기타 어떤 매체를 이용한 의사전달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표현의 자유는 내가 메시지를 외부로 전달할 자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그건 방해받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권리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누군가가 강제로 받아야 할 의무는 없다.

장터에서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를 큰 소리로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잡고 설명할 권리는 없다. 심지어 공터에 서서 혼자 떠드는 것도 제지당할 수 있다. 소음유발이니까.

글을 써서 발표할 권리는 있다. 그러나 신문사나 출판사에서 내 글을 발행해줘야 할 의무는 없다. 지나가는 사람이 내 글을 읽어 줘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다. 길거리에서 찌라시를 돌려보면 사람들이 그거 하나 받아 가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내가 메시지를 퍼트릴 권리는 있지만 타인들이 그 메시지를 수용해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타인들이 발송한 메시지를 수신할 때 무척이나 신중하게 걸러서 수용하곤 한다. 아무 말이나 들을 필요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고, 결정적으로 그럴 의무 따위는 없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바로 사상의 시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사람이 생각해낸 아이디어를 모든 사람이 심사숙고해줄 도리는 없다. 그중에서 유용하고 기발하며 참신하고 재미있는 사상만 사상의 시장에서 거래된다. 그렇지 못한 아이디어들은 가차 없이 버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무의미한 사상은 도태되는 것이 사상의 시장이다.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게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메시지의 형식을 관리해야 한다는 조건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메시지를 듣고 수용하는 사람의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메시지의 형식에도 무척이나 신경을 써야 된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메시지만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다. 하지만 누군가의 표현을 안 들을 자유도 존재한다. 이렇게 자유와 권리는 항상 의무와 선택에도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정치인에게 18원의 후원금을 보내는 것, 표현의 자유나 참정권에 해당되지 않는다. 후원금은 실질적으로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 소액이더라도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금액을 보내는 제도이다. 이 제도의 기술적 측면을 악용해서 의원실에 과도한 업무를 유발하는 행위, 그것도 단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나 참정권이 아니라 업무 방해일 뿐이다.

혼자서 하면 단순하고 사소한 업무방해겠지만 다수가 참여하게 되면 집단 업무방해이며, 대중의 힘으로 부당한 괴롭힘을 가하는 마녀사냥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법적으로 금지할 방법이 없어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 된다.

비록 청문회를 방해하는 밉살스러운 여당 정치인을 상대로 했다 하더라도 한 때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겨야 할 일이지, 권장되어서는 안 될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정의의 사도들이나 하는 행동인 것처럼 널리 퍼졌다. 그러더니 이제와서는 같은 야당 지지자들끼리 서로 상처를 주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그 행동을 표현의 자유네, 참정권이네 하며 비호하는 사람까지 등장한다.

이러지 마시라.

이렇게 옳지 않은 행위까지 "표현의 자유"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잘못 옹호하면, 나중에는 진짜 표현의 자유조차 지켜지지 않는 참담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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