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콩두 Jun 25. 2015

잉태되지 않은 미래의 아이에게

아직 잉태되지 않은 아이에게 편지를 써 보라는 아이디어는 ‘원하는 아이를 낳는 영혼태교’라는 사행심 가득한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보고서 얻은 아이디어다. 원제는 <NURTURING YOUR BABY'S  SOUL>이다. 영성운동가이자 다섯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던 미국 여자 엘리자베스 클레어 프라빗은 ‘아이를 낳기 전에 아이의 영혼과 교류하는 특별한 법’이라고 부제를 달았다. 태교책을 취미 삼아 읽어대던 시기가 있었다. 미혼의 여자가 태교책을 읽는 게 생뚱맞은가? 나대로 알리바이가 있다. 그리스 여신 식으로 말한다면 내 안에는 모성과 곡물의 여신인 데메테르 여신이 관장하는 영토가 제법 넓다. 땅 값이 제일 많이 나가는 노른자위는 아니라도 면적으로 치면 단연 1위다. 개발 제한이 걸린 그린벨트쯤 될라나? 타고난 나의 정체성이라 할 만하다. 태교책 독서는 데메테르 관심사를 은근슬쩍 내비치는 작태일 거다.

    

태교의 중요성에 대해 거론한 이야기를 나는 귀담아 듣고 마음 창고에 차곡차곡 쟁였다. 한국의 오래된 태교책 사주당 이씨의 <태교신기>에는 “스승의 십 년 교육이 어미가 배 속에서 열 달 기름만 같지 못하고, 그것은 하루 아비의 역할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하루 아비’란 잉태되는 순간, 즉 수정의 순간을 말한다. 이 책은 아이를 갖기 전에, 삼밭에 인삼을 심기 전 몇 년에 걸쳐 퇴비를 넣어 지력을 돋우는 것과 같은 시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멘토로 모시는 법륜스님은 <스님의 주례사>에는 결혼하기 전에 수행을 해서 남자와 여자가 외부 경계에 자신의 마음 상태가 덜 휩쓸리도록 하라고 권한다. 엄마가 될 주인은 아이를 잉태하기 전부터, 아이가 태중에 들었을 때는 더욱 지극히 수행하라고 강조한다. 임산부의 마음수행으로 오장육부가 편안해지면 뱃속에 든 태아도 안온하다. 주변 사람들도 그 여자의 마음이 편안하도록 배려하라고 말한다. 스님은 생애 초기 3년은 엄마가 기르라고 권한다. 이 시기는 발달심리학에서 말하는 초기 애착형성기와 일치한다. 애착은 생애 모든 관계의 기본 틀이 된다. 스님의 말은 내 마음을 천둥처럼 울렸다. 난 3년간 육아휴직을 할 수 있는 직장을 갖기 위해 공립학교 교사가 되었다. 정말이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서른 살 때 복지관에서 공립학교로 직장을 옮길 때 이직사유로 그렇게 말했을 때  갸우뚱했다. 아쉽게도 그 후 십 년이 흐를 때까지도 나는 미혼이었고, 미혼모가 되거나 입양을 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육아휴직을 쓰지 못했다. 결혼을 해서 부모 됨을  노력할 때는 마흔 넘은 만혼이라 결혼과 동시에 난임학교에도 입학을 해야 했다.    

    

최근에 나에게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도록 동기유발을 한 건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책이다. 전쟁 직후 어려운 시점인데 대가족을 꾸리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되는 글자 배우는 시점까지 다섯 아이 모두에게 육아일기를 써서 선물을 한 어머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수채화를 그리는 어머니답게 이런저런 생활 속의 사물, 풍경들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아이가 태어나던 시점의 아버지, 어머니, 친가 조부모, 외가 식구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살던 집, 입었던 옷, 잘 먹던 음식, 가지고 놀던 인형, 받은 선물, 전쟁 직후 그 아이 주변의 일을, 대신 지켜보고 기록한 이가 남겨놓았다.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나는 박정희 할머니를 한 번 직접 만난 적이 있다. 인천에 살 때 산책을 하다가 ‘평안 수채화의 집’이라는 간판을 보고 무턱대고 들어갔다. 거기가 바로 박정희 할머니가 사별한 남편의 병원 자리에 간판을 걸어 수채화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꽃바구니들이 가득했고, 할머니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창안한 박두성 선생의 따님이기도 하다.  

    

저이들의 것은 그래도 태에 아이가 든 다음에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빈 자궁으로, 아직 잉태되지도 않은 아이를 향해 편지를 쓰려고 맘 먹고 있다. 이것에 대해 지원사격을 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은 제목을 잊어먹은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책과 다산 정약용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들이 배우자 기도를 하듯 그 책에서는 결혼하기 전에 배우자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다. 누가 저 따위 우스운 짓을 하느냐고? 내가 했다. 끝장을 못 보고 내 동대 이쳤지만  100 통 가량, 한 상자쯤 썼나 보다. '이 사람과 어쨎든 살아봐야 한다' 혼인을 한 후 다시 읽어보았다. 내가 기다리던 사람과 좀 비슷한 것도 같고, 아닌 듯도 하다. 편지 상자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사랑과 결혼이 두렵지만 누군가의 짝이 되기로 결심하고, 마음을 준비해온 내가 보인다. 그것이  밑알이었다.   


가운데 아래 상자가 '미래의 남편에게 쓴 편지'. 여긴 힘을 주는 power object를 모아 놓은 나의 제단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를 간 뒤에 멀리 떨어져 지내는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권면 했다. 닭을 기른다는 둘째 아들이 수신인인 편지에서 다산은 계경을 써보도록 권한다. ‘닭을 치는 경전’쯤으로 해석되리라. 닭을 치는 경전, 차에 대한 경전, 담배에 대한 경전을 쓴다는 건, 쓰면서 학습해 간다는 의미다. 일상을 재료로 공부하길 권한다고 읽었다. 

    

네가 닭을 친다고 들었다. 양계는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양계에도 또한 우아하고 조속하고 맑고 탁한 차이가 있느니라. 능히 농서를 읽어 좋은 방법을 가려 시험해 보도록 해라. 색깔별로 갈라도 보고, 횃대를 다르게도 해 보아라. 닭이 살지고 번식하는 것이 다른 집보다 나아야 한다. 또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보기도 해야지. 사물로 사물에 얹는 것이야말로 독서하는 사람의 양계니라.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못 보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모르면서 부지런히 애써 골몰하여 이웃 채마밭 노인과 아침저녁으로 다투는 것은 다만 세 집만 사는 작은 마을의 못난이의 양계일 것이니라. 네가 어떤 것을 편안해할지 모르겠구나. 이왕 닭을 치려거든 백가서를 가져다가 닭에 관한 내용을 초록해서 차례를 매겨 <계경>을 짓도록 해라. 육우(당나라의 문인)의 <다경>이나 유득공의 <연경>처럼 한다면 또한 한 가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속된 일을 하면서도 맑은 운치를 띠르면 모름지기 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삶을 바꾼 만남> 222쪽, 정민 지음. ‘유아에게 부침’   

 

2~3년 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40대 산모가 낳은 아이는 전체 신생아의 2.4%다. 40대 임신 성공률은 5% 정도고, 난자의 염색체 이상, 유산율이 높다. 한의학에서는 7년 단위로 여자 몸의 주기를 살펴본다. 14살에 초경을 시작하고 42세 정도에는 마감을 한다. 여성의 생식력은 만 35세와 42세를 기점으로 폭포수가 급강하하듯 두 번의 급락을 맞이한다. 정부의 난임부부 지원 자격은 부인의 나이가 만 44 미만이어야 한다. 마흔 넘어 늦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다리는 나는 전국 상위 3%에 들어야 한다. 엄청 어렵네. 대학 입시보다 더. 그런데 생식, 특히 40대의 기전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열심히 스트레스 팍팍 받으면서 몸부림치면 몸은 지금이 비상사태라고 인식하고 생존에 에너지를 몰빵 하기 위해 생식을 뒷전으로 밀어버린다. 양립하기가 어려운 두 가지, 열심히 하되 마음을 비우는 모순을 푸는 과제가 주어졌다. 화두급이다.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부모와 아이는 서로를 선택해서 태어나고, 그 아이가 잉태되기 전부터 옆에 함께 있어주고 아이가 세상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함께 하는 수호성인 또는 수호천사, 수호무사 이름이 무엇이든 그런 존재가 함께 한다고. 나는 이 이야기를 믿는다. 아이의 몸과 마음에 유전과 환경의 태생적 책임을 지는 부모가 되길 우리는 소망한다. 이제 막 만나 물길을 합친 나와 남편이 바다로 잘 흘러갈 수 있기를, 우리 가족이 아름답게 만날 수 있기를, 진인사대천명, 과정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내 배가 물에 뜨면 나와 같이 강을 건널 인연이 올 것이다.  


아직 잉태되지 않은 미래의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를 이렇게 해서 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난임병원을 다니기 시작하던 결혼 7개월 때다. 씀으로써 '엄마' 마음을 장착하고 병원 일정을 겪어내고 싶었다.(1년간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가졌는데 임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난임이라고 본다. 부인의 나이가 만 35세 이상일 때는 6개월이다.) 일종의 항해일지 또는 표류기다.   



      이타카

                                (콘스탄틴 카바피)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할지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서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 마라

비록 네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기를 바라지 마라.

    

이타카는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작가의 이전글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