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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08. 2024

허공정자(空樓)


허공에 정자 하나 올렸다. 기왕이면 품격 갖춘 별장을 장만해도 좋으련만 취향대로 담담한 정자를 마련했다. 소쇄원의 제월당 (霽月堂)을 염두에 두고 지은 집이다. 사방이 탁 트인 누마루에 걸터앉아 세간사 잠시 제쳐놓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정자는 오붓한 마음의 휴식처이다. 시 한 수 지어 스스로 흥취를 돋구기도 하고 때로는 여럿이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열띤 토론을 벌이기 맞춤맞은 장소가 정자다.



정자문화가 만개했던 조선조, 가사문학의 산실인 이름난 누정 (樓亭)은 주로 영호남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중에도 자연과 운치롭게 조화 이룬 소쇄원의 누정. "시냇물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니...." 송강이 쓴 '소쇄원 초정(草亭)에 부치는 시'를 공사 기간 내내 음미했다. 더불어 자연의 소리를 거기 깃들게 하였다.

 

사이버 공간에 홈페이지를 올린 것은 지난 98년 봄. 이른바 넷조류에 합류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인터넷.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술용으로나 사용되던 인터넷이다. 여기에 홈페이지를 올린 경우는 기업이나 단체에서 홍보를 위해 개설한 외에 개인용 홈페이지는 고작 몇몇 뿐이었으나 한해 사이 지금은 거의 하늘의 별만큼 많다.



별 하나를 보탤 기회는 우연히 왔다. 그 이전 해 우리는 LAN방식의 인터넷 전용선을 깔았다. 케이불 선에 연결시키는 간단한 공사 끝에 드디어 우리집에도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열렸지만 나와는 별 상관없는 것, 나는 국외자였다.



당시 우리집 가장은 주식에 깊이 빠져 있었다. 십 년 주기쯤 될까. 온 나라에 다시 증권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것이다. 주부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주식판에 뛰어들어 한바탕 열기 뜨거웠다. 물론 그 한참 전부터 가장은 주식 열풍에 휩싸이기 시작, 제법 상당액이 물려있는 상태였다. 객장출입으로 얻어들은 정보 중에 컴퓨터를 이용한 증권거래가 유리하다며 그 대열에 낀 것이다. 이참저참 못마땅했다.



주식 시세가 자꾸만 추락했다. 밑바닥권 가까운 지경에 이르자 그의 컴퓨터 사용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결국 대구 집 한채를 날린 뒤였다. 경기가 한풀 꺾이며 시들해진 주식 열기 대신 이번에는 내가 인터넷과의 열애로 달아올랐다. 처음엔, 연수차 해외에 나가 있는 딸과의 통신수단으로 이 메일을 활용했다. 그 다음 코스로는 틈만 나면 이집저집 들락거리며 구경 다니기. 심심풀이로는 그만이었다. 이때부터 슬슬 내 놀잇감으로 용도변경, 인터넷 재미에 폭 빠졌다.



분명 꿈은 아닌데 환상의 세계도 아닌데,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가상의 공간인 인터넷 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특히 꿈풀이며 운세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동양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의 섭리를 밝힌 철리라서 철학관 간판을 달기는 했지만, 믿거나 말거나 식의 미신으로 치부되는 것들임에도. 어쨌든 현대 과학의 총아인 첨단 테크놀로지와의 웃기는 만남이었다.



차차로 마실꾼의 길눈이 트이며 미술관 박물관으로 나들이 발길이 바빠졌다. 원하는 자료의 텍스트는 물론 이미지와 사운드, 동영상까지 제공해주는 인터넷의 다기다양한 재주가 신기( 神技)인 양 놀라웠다. 건강상담에다 정부기관에 들어가 신이 나는 질의도 몇 차례, 하여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계속 늘어갔다. ‘종소리’라는 아이디만 내건 채 익명의 자유를 즐기며 여기저기 웹서핑을 다닌 많은 날들.  번개팅을 통해 현실공간에서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좋은 이웃들도 생겼다. 당시 인터넷 동호인 모임인 ‘산에 가기’란 성당 산행팀과는 자주 부산 인근 등산도 다녔다.



욕심이 생겼다. 말 타면 경마잡히고 싶다더니 마이 홈을 갖고 싶은 욕망이 모락모락 일었다. 안달이 난 나는 딸아이가 연수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딸내미를 졸랐다. 나름대로 참고할 만한 사이트를 메모해놓고 아이콘을 수집했으며 기획을 짜 기본윤곽을 스케치하는 등 준비도 해둔 터라 공사는 순조로이 진행됐다.



그러나 웹마스터인 딸의 독주와 횡포라니. 타 사이트에서 본 흥미로운 기능들, 이를테면 흐르는 글자나 물결 파동 등을 활용하자는 의견은 일언지하에 묵살. 사이트 성격상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격에도 맞지 않는다며 분위기 파악 좀 하라고 핀잔을 준다. 골라둔 사진도 유아적 취미라느니 달력 그림이라느니 타박이다못해 수준 안 맞는 고집 부리면 작업에서 손 털겠다며 엄포다.



현관 역할을 하는 메인 화면 구성은 몇 번의 의견충돌 끝에 합의에 이르렀고, 익명성이 최대 매력인 인터넷에서 시시콜콜 신상명세서에 사진까지 넣는다고 프로필 만들 때 어지간히 마찰이 심했다. 가족사진도 한 장 끼워 넣으려던 애초의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할 밖에 없었다. 홈피 간판 격인 글씨체 선택과 바탕색 선정, 음악 선곡이나 더러 의견이 일치됐다. 긴 기다림과 인내심과 기타 우여곡절을 거쳐 방문자의 숫자를 표기하는 카운터 고르기를 끝으로 완성을 본 나의 집. 검색엔진에 홈페이지 주소를 등록하는 것으로 공사는 마무리를 지었다.



마침내 사이버 세계, 가상공간에 집을 짓고 주소를 올린 것이다. 어쨌거나 컴맹의 비약적인 발전, 넷맹의 놀라운 변신이다. 공중에 세운 누각, 구박뎅이 주식 덕택으로 의외의 소망 하나를 이룬 셈이다. 홈을 운영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식구들의 눈총 따가운 가운데 살림은 대충대충, 밖에 볼일이 있어도 얼른 끝내고 서둘러 돌아오기 바쁘다. 인터넷에 몰두하다 냄비 몇 개 태우고 심지어는 친구와의 점심식사 약속을 잊기도 했다. 보다못한 딸아이가 인터넷 중독증상 테스트 내용을 게시판에 올리기에 이르렀고 중증이라며 삐용삐용ㅡ구급차를 띄우기도 하는 재미진 공간.



한 사람 두 사람 늘어가는 방문객을 맞는 일도 즐겁다. 우산이니 국향이니 달빛이니 하는 상징적인 아이디로 통하는 세상, 연령과 성별 불문이므로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매임이 없이 자유롭다. 술잔이 아니라도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대화 속에 오가는 정이 도탑게 쌓여간다. 지구촌이 한 울타리 안, 그 어디든 바로 지척거리다. 기침소리도 금방 온데로 소문이 돌 정도다. 호된 오뉴월 감기로 몸져눕자 우리집에도 웹 친구들이 줄줄이 문병을 왔다. 멋진 선율이 흐르는 시에다 꽃바구니며 과일을 건네는 살뜰한 벗뿐이랴. 미국 사는 친구는 록키산맥에서 캔 더덕구이를보내왔다. 내 기호를 파악한 친구는 좋아하는 풍경소리를 담아 보내주는가 하면 이얍ㅡ하며 기를 보내는 젊은 친구도 있었다.

 

세연지 곡수당(曲水堂)에 올라 오우가를 읊은 고산(孤山)의 정취야 감히 따를 수 있으랴만 이만한 신선놀음이 어디 그리 흔할까. 게다가 수시로 먼데서 벗이 찾아오니 이 아니 즐거운가. 새소리 따라 흐르는 물가에서 한 친구 노래 보내면 시 한 소절로 화답하며 유유자적.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산다. 정자엔 넘나드는 청풍명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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