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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08. 2024

빛나는 바다 광해, 열여덟 해 유배 인내로 버티다가

선조와 인조 사이 광해


영주권과 달리 시민권을 받아 미국 국적을 취득하면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은 말소가 된다.

단 65세 이상이 되면 복수국적이 허용되는지라 한국적을 되찾기로 했다.

2019년 국적회복 준비를 할 당시 머물던 곳은 일산 언니 집이었다.

일산은 경기도라 법무부 남양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관련 서류를 작성해서 국적회복 신청을 해뒀다.

제반 서류를 제출해 놓고 절차에 따라 대기하는 기간이 반년 넘어 걸렸다.

그동안 빈 공간을 이용해 인근에 산재해 있는 조선 왕궁과 왕릉을 답사하던 중이었다.

고양에 있는 서오릉과 서삼릉을 비롯해 남양주에 있는 광릉을 다녀오다가 지척거리인 광해군 능도 방문해 보려 했다.

그러나 광해군 묘는 평상시 공개하지 않는다 해서 아쉽지만 도리없이 접고 말았다.

조선왕조 오백 년을 통틀어 연산군과 나란히 폭군으로 찍히며 조선왕조실록에서조차 광해군일기라고 격하돼버린 임금인 광해.

선대 왕이 승하하면 사관이 매일 기록한 일기인 사초며 춘추관에서 편찬한 국정 기록물들을 참조해 실록을 만든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엮어지는 왕의 일대를 기술한 기록물이 끝내 실록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실록이 아닌 일기로 남겨진다는 건 여전히 아직도 군주의 자리에서 쫓겨난 후 왕으로서의 신원이 회복되지 않아서이다.

숙부에 의해 왕위에서 내쳐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그의 사후 기록물은 노산군일기라 불렸다.

그러다 뒤늦게 숙종조에 이르러 억울한 죽음이 인정되며 복원, 단종실록이 됐던 것처럼.

조선이 순종으로 막을 내리지 않았다면 언젠가 역사기록이 다시 조정되고 재평가되어 신분 회복이 됐겠으나 그럴 기회도 닫혔다.


그즈음 광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데는 이유가 있다.

경남지방을 여행하는 중에 산천재에 들렀고 거기서 남명 선생을 만나게 되어서다.

지리산이 마주 보이는 산청은 영남 지방 정신문화의 뿌리인 남명학파가 깃들어 크게 번성한 지역으로 이름 높다.

남명 조식 선생은 성리학의 이론에 치중하지 않았으며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을 펴나가던 분이었다.

퇴계 선생과 함께 당대 영남 좌, 우에서 쌍벽을 이룬 성리학자였던 남명 선생은 벼슬 마다하고 일관된 처사(處士)의 삶을 살았다.

남명은 연산군 7년에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선조 대까지 산 조선 중기 유학자다.

그 무렵의 조정은 피바람 그칠 새 없던 시기로 외척의 발호와 파벌 간 당쟁 싸움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시국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란기, 사화로 얼룩진 혼미스러운 정국이었으니 자칫 탁류에 휩쓸려 이름이나 욕되게 할 뿐.

남명 선생은 국가 경영에 참여하는 대신 초야에 묻혀 지방인재를 길러냈다.

산천재에 앉아 나라의 먼 장래를 바라보며 올곧은 인재 양성에 힘써 훗날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선각자.

학문과 삶의 일치, 삶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며 '실천궁행'을 우선순위에 두었던 실천 유학의 대가.

부조리한 현실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 비판하며 어떤 권력과도 정면으로 맞서 싸운 투사.

사사로운 욕심이 티끌만큼만 쌓여도 칼로 배를 갈라 맑을 물에 씻겠다는 결기 시퍼런 처사, 그가 남명 선생이었다.

남명 선생 사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며 조선 땅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왜군이 부산포를 단숨에 휩쓸고는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자 얼마 후 한양 도성도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조정은 성리학자로 가득 찼으나 관료들은 부리나케 다 도망치고 임금은 종묘사직을 버리고 허겁지겁 의주로 몽진했다.

이때 그의 문하에서 50여 명에 이르는 의병장이 배출돼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지켜냈으니 그중엔 곽재우와 정인홍도 있었던 것.

유학자들 대부분이 책상물림이나 한 백면서생으로 소심하고 유약한 선비였으나, 추상같은 일도양단의 정신으로 올곧은 대의명분이면 지체없이 그 길 따를 줄 안 제자들.

임란이 끝나고 광해군 초기, 왕의 개혁 의지에 뜻 같이한 세력으로 대거 등용됐던 남명의 제자들은 인조반정 후 대부분 실각됐다.

여기서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과 인연이 닿게 된 의병장인 이이첨, 정인홍의 이름이 나온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반정은, 실정을 거듭하는 왕을 쿠데타로 폐위시키고 새로 왕을 세우는 일이다.

반정으로 잘못된 것이 바로 잡혀 세상이 바르게 이어져야 함에도 외려 더 험하게 바뀌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경우가 있었다.

광해군은 패악 군주인데다 명나라에 대한 실리외교 노선을 비판해대며 왕좌에서 몰아낸 인조반정이 바로 그러했다.

1623년 광해에게 덮씌워진 죄명은 폐모살제에 따른 '혼란무도'에 정치 잘못했다며 '실정백출'로 폐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됐다.

인조반정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며 폭군으로 각인돼버린 광해군은 어릴 적부터 고립무원, 외로운 존재였다.

어머니 공빈 김씨가 광해를 낳고 두 살도 채 되기 전 눈을 감아, 자식을 두지 못한 중전 슬하에서 자랐으니 모정을 알겠는가.

후궁들에 둘러싸인 부왕으로부터 정은커녕 눈길조차 받지 못한 채 그러나 바르고 영민하게 성장해 형을 제치고 세자에 책봉된다.  

세자로 책봉하게 된 것도 임진왜란이 터져 국가위기가 닥치자 선조로서도 피치 못해서였다.

선조는 부랴사랴 의주로 몽진하며 조정을 나눈다는 뜻의 분조를 만들어 세자에게 전쟁을 선두지휘하도록 했다.

백성은 물론 자식을 적진에 내던져놓고 자신만 살고자 도망치며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하려던 무책임한 임금 선조.

광해는 실추된 왕실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몸소 선두에 서서 의병을 이끌었다.

7년 전쟁이 끝나자 눈비 맞으며 전선에서 싸운 세자는 백성들로부터 크게 신망을 얻게 된다.

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선조의 시기와 질투로 공이 힘들어했듯 세자 또한 비슷하게 고초를 겪어야 했다.

선조가 수없이 남발한 양위 파동의 불안 속에서 조마조마하게 세자의 자리를 지키며 인내로 견뎌내야 했던 광해.

아버지 선조가 어떤 인물인가, 방계로 임금 자리에 오른 데 대한 태생적 컴플렉스로 비꼬인 데다 이기적이기까지 한 선조.

중전이 끝내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선조는 세자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새 왕비를 맞는다.

젊은 중전에게서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세자직이 더욱 위태로워져 광해는 불안불안 그 얼마나 가슴 졸였을까.
  

18세에 책봉된 세자직에서 34세에 15대 왕으로 즉위했으니 그가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이란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  

왕위에 올랐어도 긴 전란으로 민생은 이를 데 없이 피폐한데다 국고도 고갈된 상태에서 전후 복구 사업을 펼쳐야 했다.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허균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완성하도록 적극 지원했으며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국조보감을 편찬했다.

민생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는 한편 중립외교정책을 펼친 점 등은 근대에 이르러서 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난리통에 불타버린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을 복구하기 위해 무리한 재정 조달을 하다가 백성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가 잡혀 끌려 나오자 백성들이 거친 말을 했다고 인조실록에 쓰여있으나 승자들의 기록 어디까지 믿을 수가?.

잠시 승리에 취해 들떠 있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이괄의 난에 더해 삼전도의 수모를 겪은 인조, 그 꼴 보려고 반정 일으켰던가.

그런 인조의 소식을 강화도 적소에서 접한 광해의 기분은 어떠하였을지.

기나긴 유배생활의 와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1637년 제주로 적소가 옮겨지며 난바다 건너 어등포(현 행원포구)에 닿게 된 광해.

지금은 노인축에도 안 들지만 당시 육십 넘으면 상노인네, 이미 강화에서 긴 세월 죄인으로 산 그를 이 먼바다까지 끌어내리다니.

망망대해 건너 파도만 철썩대는 어등포에 닿았을 때 아무리 인고의 시간에 단련된 광해라 해도 심사 얼마나 들끓었을까.

먼 훗날, 지나는 객 그 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천하에 고얀놈들!' 인조 이하 대신들 향해 꾸짖지 않을 수 없었다.

기착지 설명글에도 새겨놨듯 "성실하고 과단성있게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의 와중에 희생된 임금"인 광해다.

금삼의 피를 보고 꼭지가 돈 연산군도 아닌 광해에게 따르는 폭군 칭호 거두어질 날이 과연 오려나?

이튿날 제주목으로 이송돼 관아에서 감시하기 용이한 지척거리에 왕은 위리안치되었다.

광해는 1624년부터 강화에서 14년, 절해고도 제주에서 4년 귀양살이를 하다가 1641년 음력 7월 초하루 한 많은 생을 마친다.

제주에서는 삼복더위 한창인 음력 7월 초순마다 들녘 해갈시키게 내리는 단비를 광해우(光海雨)라 한단다

“칠월이라 초하루 날은~, 임금대왕 관하신 날. 가물당도 비오람서라. 이여~ 이여~“

우여곡절의 파란만장한 생애 모질게 살아온 광해 임금에게 바치는 제주민들의 민요가 따스한 위무(慰撫)되기를...

한라산 넘어 제주시 간 김에 광해 유배처와 제주목 관아를 찾아본 다음, 돌아오며 그의 기나긴  인고의 세월 헤아리니 숙연해졌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하였다.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면 과거의 오류와 비극은 오늘에 다시 재현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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