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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08. 2024

애련/哀 憐


그녀가 온다. 광고 카피처럼 짤막한 단음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헤드라인의 암시가 아니라도 다들 촉각을 바짝 곤두세운 채 그녀의 광폭한 몸짓을 지켜보고 있다. 아마존 여전사보다 무시무시한 그녀가 폭우와 강풍을 동반하고 잰 걸음으로 北西進 중이다. 그녀는 제어불가능, 도무지 거칠 것이 없다. 뉴스 화면 가득 팜트리가 미친 듯 요동친다. 척후병처럼 선두에 나서 막무가내로 부대끼느라 가늘고 긴 허리가 얼마나 아플까 안쓰럽다.



성난 파도가 밀리는 해안은 일단의 백마부대가 파죽지세로 진군하는 듯하다. 물에 잠긴 마을이 보이고 해일에 쓸려 집과 다리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장면도 나온다. 지역에 따라 주민 대피령이 내렸는가 하면 워싱턴과 몇몇 주에는 비상령이 선포됐다. 대서양 함대가 해군기지를 떠나 안전한 내해로 피신했다더니 대통령도 백악관을 비웠다고 한다. 뱅글뱅글 어지러이 도는 태풍의 눈이 무서운 속도로 대서양 연안을 따라 위로 올라오는 데도 원체 땅덩이가 크다 보니 이삼 일이나 걸린다. 그 사이 기세가 잦아들 법도 하련만 가공스런 파괴력은 별로 누그러들지 않는 모양이다.



부산에 살 적에도 몇 번 태풍을 만났다. 일본 열도를 통과했다 싶으면 어느새 대뜸 부산 앞바다에 거친 숨을 풀어 놓던 태풍. 가로수가 뿌리째 뽑히고 간판이 휴짓장처럼 날아다니는가 하면 해변가 횟집은 초토화되기 일쑤였다. 그처럼 직접 영향권에 들어 태풍을 겪어 보았지만 이번만큼 자연의 위세에 기가 질리지는 않았었다. 그랜드캐년의 위용에 질려 인간이란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던 그때처럼 옥죄어드는 위축감.



바하마에서 곧장 플로리다로 올라와 사정없이 노스캐롤라이나를 훑은 다음 버지니아를 강타하고 북상 중인 허리케인 이사벨. 잿물 빛 음울한 하늘을 가르며 스펙터클한 장관을 연출하는 번개. 지구 한 켠이 무너져 내리듯 지축을 흔들어 대는 천둥소리. 죽창처럼 내리 꽂히는 빗줄기에 세상을 요절낼 듯 마구잡이로 난타하는 바람까지 그 기세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창가에 내건 풍경소리가 부산스럽게 여겨지기도 처음. 사나운 비바람으로 어수선하기 그지없던 하루였다. 쏴아-쏴아- 이리저리 마구 몸부림쳐대는 숲은 성난 메두사의 머릿채 같았다.



허리케인이 카운티 외곽을 휩쓸고 지난 그 이튿날. 정연하던 단풍나무숲은 난장판처럼 어지러웠다. 자로 모로 쓰러진 나무 둥치며 어거지로 찢긴 생가지들. 뜰도 경황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모진 폭풍우에 태질 당한 나무들이 마구잡이로 지체들을 떨구어 놓았기 때문이다. 꺾인 줄기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데다 만신창이로 찢긴 이파리들이 아예 수북하다. 밤새 미친 듯 설쳐대던 비바람이 남긴 상흔들이다. 불가항력의 폭력을 온 몸으로 치러야 만 했던 나무의 순명 혹은 체념, 역시 애련하다. 개미집을 괜히 발로 뭉개버리는 심술쟁이 아이처럼 하늘도 때론 평온한 풍경 한 자락을 흔들어대고 싶어지는 걸까. 신산한 것은 사람살이만이 아니란 사실 앞에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든다.



이마에 상처 떠날 날이 없는 저 고양이만 해도 그렇다. 소상(塑像)이듯 꼼짝하지 않고 발치에 누워 있는 나비는 원래 들고양이였다. 볕살 다사롭던 이태 전 어느 봄날. 우리 집 베란다에 녀석을 제 어미가 슬쩍 유기시키고 사라진 후부터 돌보기 시작했으니 어언 두 해 넘는 식객이다. 목에 하얀 나비 타이를 두르고 네 발 모두 백구두로 치레를 한 녀석은 새끼 고양이 적엔 퍽 귀여웠는데 이젠 다 커서 밤마실이 잦다.



그럼에도 녀석은 자주 상처를 입고 비실거리며 나타나기 일쑤다. 잔등이며 코 언저리 심지어 귀까지 물어 뜯겨 와서는 바셀린 연고를 발라주면 수굿하니 앉아 있다. 인근에 얼쩡대는 누런 들고양이와의 영역 다툼인지, 아니면 포시라운 처지에 대한 시샘 때문에 무리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치열한 쌈박질 끝에 늘 피를 보는 녀석. 그간 우리가 분에 심은 화초처럼 키운 탓에 거친 야생의 생리를 익힐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적자생존의 법칙,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냉엄한 자연계에서 그러니 번번이 상처뿐인 패자로 밀린다.



함께 뜨락을 내려다보던 녀석이 갑자기 후다닥 내닫는다. 질펀하게 흩어져 있는 푸른 이파리 사이에서 무언가 파닥이는 움직임이 보인 듯싶은 그 즉시다. 녀석이 전리품이나 되는 양 자랑스레 물어다 내 앞에 놓은 것은 깃털 부스스한 한 마리 새. 저항할 아무런 힘조차 없이 그저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새는 거의 초주검 상태다. 죽지에 피가 배어 있는 걸로 봐서 날개를 다친 듯싶다. 간밤의 폭풍에 둥지를 잃고 조난당한 걸까. 애소하듯 올려다보는 파르스름 까만 눈, 요절한 시인의 선한 눈빛처럼 애잔하다.



그 가여운 것을 공깃돌 어르듯 발로 슬쩍슬쩍 건드려 보는 고양이. 새는 비칠거리며 달아나 보려 하나 역부족, 안타까운 본능의 몸짓일 따름이다. 여유작작하게 놀이를 즐기고 있는 고양이는 악역인 가해자, 나는 이미 새 편이다. 손을 뻗어 새를 뺏으려 하니 고양이는 발톱을 세우며 앙칼진 본색을 드러낸다. 결코 내놓을 수 없다는 단호한 기세다. 둘 사이를 갈라놓는 방법은 단 하나. 평소 좋아하는 우유로 고양이를 멀찌감치 유인한다. 잠시 머뭇대던 고양이가 아쉬운 채로 새를 포기하고는 먹이 있는 데로 방향을 튼다. 그 틈을 타서 얼른 새를 집었다. 솜뭉치마냥 가볍다. 파르르~ 전류 흐르듯 전해오는 떨림. 새가슴이라더니 할딱이는 숨결이 구급차의 급박한 사이렌 소리를 연상시킨다.



고양이 이마에 듬뿍 발라주었던 바셀린 연고를 이번엔 새의 죽지에 엷게 펴 바른다. 저를 해치지 않을 거란 믿음이 들었던지 구석으로만 피하던 새가 과자 부스러기를 쪼을 만큼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그를 제 자리로 돌려보낼 차례. 인동초 우거진 덤불 위에 새를 올려놓았더니 고개를 갸웃대다가는 포르릉 단풍나무숲으로 날아간다. 큰 상처가 작은 상처를 표 안 나게 보듬어 안는다.



그래.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는 사바세계. 참고 견디는 세상이란 뜻이란다. 살아가면서 제각금 겪는 크고 작은 태풍들. 그러나 시련은 우리를 연단(練鍛)하는 한 도구일 뿐이라고 했다.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 고통은 없듯 허리케인으로 피폐해진 숲은 다시 푸르름 되찾을 터. 그 숲에 깃든 저 여린 생명의 전도에 부디 예리한 매의 부리도, 거친 폭풍도 비껴 지나기를. 생명 있는 모든 것 질곡 없이 두려움 없이 평강할 수 있기를.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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