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r 08. 2024

행동하는 지성, 실천하는 양심 남명 선생 -셋-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7. 산천재 뜰에 눈보라 자욱한 날 눈 감으시다



지조와 절의를 지키는 데는 서릿발처럼 차갑고, 백성들 살피고 위함에 있어 정오 햇살만큼 따뜻했던 선비.

학문에 매진하는 한편 자아완성을 위해 끝없이 수양하며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면서 정도만을 걸은 지사.

산천재에 앉아 나라의 먼 장래를 바라보며 올곧은 인재 양성에 힘써 훗날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선각자.

학문과 삶의 일치, 삶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며 '실천궁행'을 우선순위에 두었던 실천 유학의 대가.

부조리한 현실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 비판하며 어떤 권력과도 정면으로 맞서 싸운 투사.

사사로운 욕심이 티끌만큼만 쌓여도 칼로 배를 갈라 맑을 물에 씻겠다는 결기 시퍼런 처사, 그가 남명 선생이었다.

지리산 천왕봉처럼 우뚝한 조선의 정신을 높이 산 조정에서는 십수 차례 관직 내려 부르나 그는 끝끝내 요지부동.

1567년 외척 비리를 키운 문정왕후 사후 명종의 부름에 응해 단 한 번 임금을 만나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진언하고 돌아왔다.

그 이듬해 즉위한 선조가 벼슬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대신 치국의 도리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린다.

무진봉사에서는 찬찬히 사회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군왕의 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하의 역할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훈구세력과 결탁했던 서리의 폐단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극렬히 비판한 글로 유명하다.

"... 고래로 권신이 제멋대로 결정한 일이 혹 있었고 외척이 발호한 일이 혹 있었고 내시가 정령을 가로챈 일이 혹 있었습니다만 지금처럼 서리들이 나랏일을 농락하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했습니다.

군민의 온갖 정사와 국가의 기밀이 모두 그들 손에 의해 처리되고 지방의 납세와 공물이 먼저 그들의 배를 채운 뒤에야 비로소 전달되는 것입니다.... 왕권의 위엄을 떨치시고 친히 재상과 집사들을 조사하여 그 까닭을 규명하시고 직접 처단하신다면 이는 임금이 악을 극도로 미워하심을 알고 백성들이 죄악을 범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긴 척신 정치의 병폐와 사색당파로 속속들이 곪아버린 조선조나, 선진국에선 이미 한물 지난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좌. 우가 대립하며 시끄럽기만 한 현재나 별반 달라진 것도 없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서리망국론은 지금까지도 청산되지 않은 채 여전한 고위 정부 각료나 국회의원, 법조계, 언론계 일각의 부패 현상으로 그대로 적용되니 실로 통탄스러운 노릇이다.  

설령 오늘날 무진봉사같은 글 쓰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이에 귀 기울여 옳게 받아들이는 위정자도 없는 세월임이 더욱 암담하다.

선조는 남명이 올린 치국의 도리를 고마이 새기며 1571년 그에게 특별히 전답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남명은 사은소(謝恩疏)로 감사를 표한다.

선조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은 탁월했던 모양이나 결국 우유부단한 임금 선조는 군왕의 도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을 겪게 된다.     

섬 오랑캐 때문에 이 나라 백성이 곤경에 빠지리니, 길쌈하며 실이 모자란 것은 돌아보지 않고 주나라 왕실이 망할 것을 근심하는 고사 속 과부와 같은 격이라고 조정과 유학자들을 질타하며 홀로 방비책을 강구해 나가는 남명 선생.

또한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고 맑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성찰하여 결단한다.” 주역의 곤괘(坤卦)에 나오는 대로 경의검에 새긴 글귀, '안에서 깨끗하게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는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의자(內明者敬 外斷者義)'란 글뜻을 평생 두고 참구한 남명 선생이다.

남명학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경의 사상이다.

더불어 가르친 것은 지식을 배우는 글공부나 말 잘하는 공부보다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바르게 실천해 쌓아가는 수양이 참다운 배움이란 것을 선생은 늘 강조하며 더불어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이치를 쉽게 풀어 펼쳤다.

하학상달은 논어에 나오는 말씀으로 아래 下, 배울 學, 위 上, 통달할 達, 바닥에서부터 배워나가 위로 큰 공부에 도달한다는 뜻. 먼저 쉬운 기초지식부터 배워 점진적으로 어려운 이치를 깨달아 나가라며 남명은 진흙펄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예로 들었다.

그리하여 아래로는 인간의 사리(事理)를 배우고 위로는 하늘의 도리 (道理)를 꿰뚫어 통하게 된다는 것.

즉, 단번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걸리지만 기초부터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쌓아올라가는 것이 진정한 배움의 길이라고 역설한다.     

허나 마음이 조급한 사람들은 배움에서도 지름길, 속성과만 찾고 어서 속히 출세하여 윗자리 차지하는 데만 급급함에 있어 예나 이제나 다른 점이 없는듯하다.

"자는 집집마다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구장복(천자가 입는 예복)을 마름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버선 한 짝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네. "선생께서는 깊이 한탄하신다.

공자의 말씀처럼 활법(活法)은 모름지기 마루 아래 바퀴 다듬는 사람이 터득했나니 다섯 수레 가득한 책의 의미도 삿됨 없는 그 한 가지인 것을.... 이는 서예가로 추사와 자웅을 겨룬 한석봉 어머니의 가래떡 썰기 고사로도 쉬 헤아릴 수 있다.

학자가 책상에서 관념적 언어의 유희로 공맹을 논하지만 실제에 있어 머리에 든 거 따로 하는 짓 따로다.

그보다는 쓰임새 있는 공부를 잡고 우선 밑바탕부터 다져 단 한 가지라도 자유자재로 운용해 쓸 수 있는 실천적 수단을 꾸준히 연마해 나가라는 얘기, 곧 머리만으로 공부하기보다는 몸으로 공부해 실제 체험을 쌓으라는 거다.

경과 의를 바탕으로 한 하학상달의 묘리를 이처럼 쉽게 밝혀주셨음에도 귀 어둡고 청맹과니인 우리는 그저 헛된 문자와 언어만 희롱하며 아는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 자신 먼저 돌아볼 일이다.

쉬운 것이나 가까운 데 있는 것부터 배워서 점차 깊은 학문에 나아감이 당연함에도 그러나 대부분이 가까이 있는 것은 하찮거나 가벼이 여기고 하늘의 뜬구름 같은 고담준론만 귀히 여겨 좇으려 한다.

선생이 경계한 바가 바로 이 점이다.



"庸信庸謹 閑邪存誠 岳立淵沖 燁燁春榮"

(용신용근 한사존성 악립연충 엽엽춘영)



"언행을 신의 있게 하고 스스로 삼가며, 사악함을 막고 성심을 보존하라.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남명 선생 좌우명-



학문과 덕행이 스스로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 결과물이 현실에 제대로 적용돼 백성들에게 고루 미치지 못함을 심히 안타까워 한 남명선생.

내면의 수양을 뜻하는 경(敬)과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의미하는의(義)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아 후학을 가르친 남명 선생은 천수를 다하고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는 1572년 2월 8일로 그분 나이 72세였으며 산천재 밖에는 자욱이 눈보라 휘날렸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학문은 경의(敬義) 두 글자로 집약되는 바 이는 변함없는 진리이니 힘써 따를 것을 당부하고, 사후 칭호는 '처사'로 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선생이 남긴 <사상례절요>라는 상례 절차에 따라 제자들은 예를 다해 생전에 선생이 정해 둔 산천재 뒷산에 모셨다.

남명집, 신명사도, 남명학기유편, 파한잡기, 권선지로가 등 다수의 저작이 남아있다.




8.  임진왜란 발발 시 의병활동으로 명성 드높아진 남명의 실천 학풍



선생 사후 4년 뒤 가까이 모셨던 제자들이 덕천서원을 세워 경의 사상을 심화 확산하는 장소로 삼았다.

생전에 산천재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혼미한 정국과 그로 인해 위기가 닥칠 나라 상황을 근심하며 남쪽 바다에서 설치는 왜구를 경계해 방책을 세우고자 병술을 가르치며 묵묵히 앞날을 대비했던 남명 선생이다.

혼란스러운 이념의 충돌로 갈등 겪는 오늘날 만약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어떤 처방을 내리셨을까.

한쪽은 남북공조와 남북화해만이 민족의 살 길이라 믿는다. 평화통일이 목전에 왔다며 금방 남북이 하나 될 듯 들떠있지만, 반면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알고 살아온 반공 세대들의 계산법은 다르다.

같은 말을 쓰고 한민족이란 단순논리에 의거한 통일론만으로 과연 70년 세월 사상이 다르고 의식이 다르며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그리 쉽게 하나로 융화될 수 있을지 우려스러운 것.  

더구나 핵 무장은 누구를 겨냥한 것이며 연방제의 저의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뿐 아니다. 남한 내에서도 남남갈등이라는 내홍을 겪고 있으며 정국은 여전히 불안하고 같은 정당 안에서도 서로를 불신하는 풍조가 만연해, 실제 여차하면 배를 바꿔 타 정치철새가 되는 모반도 불사하는 세태다.

명분이야 어떠하든 아무리 결과가 좋았다 해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일이나 왕건이 궁예를 제거한 당시 정황이야 일단 모반에 속한다.

박 대통령 탄핵 투표를 마치고 나오며 엘리베이터에서 김무성과 이정현이 어깨를 치며 나누던 비열하고 사악한 웃음은 무엇을 말해주던가.

배신의 아이콘이 된 유승민은 남못잖게 똑똑한 경제통으로 정계에서 알아주는 정책 브레인이었으나, 원조 친박에서 비박으로 돌아서며 배신자로 낙인찍혀 재기불능 상태로 도태되지 않던가.

저마다 말만 분분한 이 시대, 남명 선생이라면 지금 현실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비판을 하실까 궁금하다.

무를 닦아 의를 지키라 주문하며 문사(文士)를 키우되 무예와 병법까지도 병행해서 가르친 남명의 문무병중(文武竝重) 교육은 선각자의 남다른 선견지명이 있어서인가.

그의 사후로부터 2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며 조선 땅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왜군이 부산포를 단숨에 휩쓸고는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자 얼마 후 한양 도성도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조정은 성리학자로 가득 찼으나 관료들은 부리나케 다 도망치고 임금은 종묘사직을 버리고 허겁지겁 의주로 몽진했다.

이제 왜장들은 곡창지 전라도만 접수하면 끝이었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며 힘없는 백성들이 죽어나가자 경의 사상에 입각한 실천유학의 정신을 체득한 남명의 제자들은 난국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적극 현실참여에 나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합천, 성주, 의령, 연산, 창녕, 현풍 등지에서 곽재우, 조종도, 김면, 정인홍 등 의병장이 들고일어나 왜적의 낙동강 서쪽 지역 진출을 막음은 물론 해전에 임해 고군분투하는 이순신 장군을 배후 지원하였다.

이때 전국 최초로 왜적에 맞서 나선 의병장이 남명의 외손녀 사위이기도 한 곽재우였다.

열여섯에 남명 문하에 들어 폭넓게 독서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는데 필체가 활달하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특히 그는 무에 능했다.

본관이 현풍인 그는 의령에서도 이름난 부호 집안 출신으로 왜란이 터지자 만석지기 재산을 다 털어 2천여 의병을 모아서 의(義)자 깃발 높이 치켜들고 눈에 띄는 붉은 옷을 떨쳐입은 채 선봉에 나섰다.

손자병법에서도 첫째로 치는 게 경제 지원 여부이듯 일단 곽재우 장군에게는 든든한 자산이 있었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아로새긴 그는 온 재산을 아낌없이 풀어놓을 수 있었고 신명까지도 바칠 각오가 서있었다.

진지에서는 양반 상놈 구분이 따로 없다면서 자기 아들 옷을 노비의 아들에게 입히는 등 전통적인 유학자의 틀을 깬 데다 전투에 임하면 솔선수범 앞장섰기에 의병들 모두 사기충천하여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정유 재난 때 경상우도 방어사로 임명돼 화왕산성을 수비했으며 경상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 관직에 임명됐으나 사퇴하고 망우정을 지어 초야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생을 마쳤다.

남명의 적손인 외동딸이 결혼해 두 딸을 두었으며, 하나는 곽재우와 혼인하고 다른 한 명 역시 남명 제자인 김우옹과 결혼하는데 그를 아낀 남명은 말년에 성성자를 김우옹에게 맡겼다.

남명 정신의 상징인 경의검은 수제자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경의 사상을 이어가라 하였다고 실록에 나와있다.

당시 유학자들 대부분이 책상물림한 백면서생으로 소심하고 유약한 선비였으나 남명 문중에서는 이렇듯  50여 명에 이르는 의병장이 배출돼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지켜냈던 것.

여기에 이르러 남명의 실천 학풍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9. 실천적 선비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되나


선생 사후 4년 뒤 가까이 모셨던 제자들이 산천재 옆에 덕천서원을 세워 경의 사상을 심화 확산하는 장소로 삼았다.

그의 고향인 합천에는 문도들이 힘을 모아 회현 서원을 세웠으며 김해에는 신어산 기상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의미의 신산서원을 배향했다.

그렇게 스승에 대한 추존 사업을 전개해 남명의 학풍은 면면히 이어졌으나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로 갈수록 퇴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으며 남명학이 위축되고 쇠퇴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조선 후기 난세의 정치 풍토와도 무관치 않으며 사회역학적 이해관계에 따른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근본적으로 옳은 것인 줄 알면 옳지 않은 일은 하지 말아야 됨에도 알면서도 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인 사회의 고질적 병폐 때문이다.

지금도 이 점은 현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바, 기득권층일수록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는커녕 가진 자의 사회적 의무 이행에 소홀한 경향이 두드러진 한국이다.

두 번째는 광해군 초기, 왕의 개혁 의지에 뜻을 같이한 세력으로 대거 등용됐던 남명의 제자들이 인조반정 후 대부분 실각되며 완전 몰락했기에 남명 사상을 널리 알리고 펴나갈 길이 이후 거의 막히고 말았다.

어느 정치세력이나 막론하고 일단 권력을 잡으면 휘하 인물 또는 추종자들을 대거 주변에 포진시키게 마련.

요즘처럼 좌파가 정권을 잡으면 우파 인사들은 절로 도태되지 않던가.

셋째로 일제 치하 학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는데 이는 임란 당시 적대적 행동을 한 의병장 다수가 남명 문하에서 배출되어 왜에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이에 더해 남명 사상의 전파로 추상같은 일도양단의 정신, 올곧은 대의명분이면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독립의지와 투쟁의 싹을 미리 절단시켜야 할 필요성도 있었겠다.

지난 8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남명 정신 계승에 대한 학계의 자각에 따른 교육과 범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남명학이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싯점, 실천적 선비의 삶에서 우리 각자는 무엇을 배워야 하고 행해야 될까.

학문이란 반궁실천(反窮實踐)하고 지경 실행(持敬實行) 해야 하는 것.

좋은 말씀 배우고 익힌 그 앎의 바탕에 몸으로 체득한 경의정신을 얹어 매사 스스로를 경계하여 자신을 돌이켜보며 깊이 성찰하고 옳은 일을 보매 실천에 주력함이 중요하다.

모름지기 내가 서있는 이 땅의 상황과 때를 살펴 이에 맞게 적절히 움직이되 표리부동하거나 이중적이지 말고 매사 진정성 있게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려는 의지가 필요하겠다.

말만 앞선 지식인이 되지 말 것이며 불의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라면 이는 행위의 옳고 그름과 선악 분별심이 있다고 볼 수 없음일 터.  

산청에는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세워져 남명의 얼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연구, 교육 활동과 더불어 홍보활동을 적극 펴나가고 있으니 기대되는 바 크다.

늦은 때란 없다. 바로 지금이 그때이고 출발은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다.






우음(偶吟), 남명 선생의 <우연히 읊다>란 시조로 긴 포스팅 마무리한다.



人之愛正士 (인지애정사) 사람들이 곧은 선비를 존경하는 것이

好虎皮相似(호호피상사) 호랑이 가죽을 좋아함과 유사하네.

生前欲殺之(생전욕살지) 살았을 때에는 죽이려고 하다가

死後方稱美(사후방칭미) 죽은 후에는 미덕으로 칭찬하네.

작가의 이전글 행동하는 지성, 실천하는 양심 -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