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와 절의를 지키는 데는 서릿발처럼 차갑고, 백성들 살피고 위함에 있어 정오 햇살만큼 따뜻했던 선비.
학문에 매진하는 한편 자아완성을 위해 끝없이 수양하며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면서 정도만을 걸은 지사.
산천재에 앉아 나라의 먼 장래를 바라보며 올곧은 인재 양성에 힘써 훗날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선각자.
학문과 삶의 일치, 삶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며 '실천궁행'을 우선순위에 두었던 실천 유학의 대가.
부조리한 현실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 비판하며 어떤 권력과도 정면으로 맞서 싸운 투사.
사사로운 욕심이 티끌만큼만 쌓여도 칼로 배를 갈라 맑을 물에 씻겠다는 결기 시퍼런 처사, 그가 남명 선생이었다.
지리산 천왕봉처럼 우뚝한 조선의 정신을 높이 산 조정에서는 십수 차례 관직 내려 부르나 그는 끝끝내 요지부동.
1567년 외척 비리를 키운 문정왕후 사후 명종의 부름에 응해 단 한 번 임금을 만나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진언하고 돌아왔다.
그 이듬해 즉위한 선조가 벼슬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대신 치국의 도리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린다.
무진봉사에서는 찬찬히 사회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군왕의 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하의 역할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훈구세력과 결탁했던 서리의 폐단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극렬히 비판한 글로 유명하다.
"... 고래로 권신이 제멋대로 결정한 일이 혹 있었고 외척이 발호한 일이 혹 있었고 내시가 정령을 가로챈 일이 혹 있었습니다만 지금처럼 서리들이 나랏일을 농락하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했습니다.
군민의 온갖 정사와 국가의 기밀이 모두 그들 손에 의해 처리되고 지방의 납세와 공물이 먼저 그들의 배를 채운 뒤에야 비로소 전달되는 것입니다.... 왕권의 위엄을 떨치시고 친히 재상과 집사들을 조사하여 그 까닭을 규명하시고 직접 처단하신다면 이는 임금이 악을 극도로 미워하심을 알고 백성들이 죄악을 범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긴 척신 정치의 병폐와 사색당파로 속속들이 곪아버린 조선조나, 선진국에선 이미 한물 지난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좌. 우가 대립하며 시끄럽기만 한 현재나 별반 달라진 것도 없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서리망국론은 지금까지도 청산되지 않은 채 여전한 고위 정부 각료나 국회의원, 법조계, 언론계 일각의 부패 현상으로 그대로 적용되니 실로 통탄스러운 노릇이다.
설령 오늘날 무진봉사같은 글 쓰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이에 귀 기울여 옳게 받아들이는 위정자도 없는 세월임이 더욱 암담하다.
선조는 남명이 올린 치국의 도리를 고마이 새기며 1571년 그에게 특별히 전답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남명은 사은소(謝恩疏)로 감사를 표한다.
선조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은 탁월했던 모양이나 결국 우유부단한 임금 선조는 군왕의 도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을 겪게 된다.
섬 오랑캐 때문에 이 나라 백성이 곤경에 빠지리니, 길쌈하며 실이 모자란 것은 돌아보지 않고 주나라 왕실이 망할 것을 근심하는 고사 속 과부와 같은 격이라고 조정과 유학자들을 질타하며 홀로 방비책을 강구해 나가는 남명 선생.
또한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고 맑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성찰하여 결단한다.” 주역의 곤괘(坤卦)에 나오는 대로 경의검에 새긴 글귀, '안에서 깨끗하게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는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의자(內明者敬 外斷者義)'란 글뜻을 평생 두고 참구한 남명 선생이다.
남명학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경의 사상이다.
더불어 가르친 것은 지식을 배우는 글공부나 말 잘하는 공부보다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바르게 실천해 쌓아가는 수양이 참다운 배움이란 것을 선생은 늘 강조하며 더불어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이치를 쉽게 풀어 펼쳤다.
하학상달은 논어에 나오는 말씀으로 아래 下, 배울 學, 위 上, 통달할 達, 바닥에서부터 배워나가 위로 큰 공부에 도달한다는 뜻. 먼저 쉬운 기초지식부터 배워 점진적으로 어려운 이치를 깨달아 나가라며 남명은 진흙펄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예로 들었다.
그리하여 아래로는 인간의 사리(事理)를 배우고 위로는 하늘의 도리 (道理)를 꿰뚫어 통하게 된다는 것.
즉, 단번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걸리지만 기초부터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쌓아올라가는 것이 진정한 배움의 길이라고 역설한다.
허나 마음이 조급한 사람들은 배움에서도 지름길, 속성과만 찾고 어서 속히 출세하여 윗자리 차지하는 데만 급급함에 있어 예나 이제나 다른 점이 없는듯하다.
"자는 집집마다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구장복(천자가 입는 예복)을 마름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버선 한 짝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네. "선생께서는 깊이 한탄하신다.
공자의 말씀처럼 활법(活法)은 모름지기 마루 아래 바퀴 다듬는 사람이 터득했나니 다섯 수레 가득한 책의 의미도 삿됨 없는 그 한 가지인 것을.... 이는 서예가로 추사와 자웅을 겨룬 한석봉 어머니의 가래떡 썰기 고사로도 쉬 헤아릴 수 있다.
학자가 책상에서 관념적 언어의 유희로 공맹을 논하지만 실제에 있어 머리에 든 거 따로 하는 짓 따로다.
그보다는 쓰임새 있는 공부를 잡고 우선 밑바탕부터 다져 단 한 가지라도 자유자재로 운용해 쓸 수 있는 실천적 수단을 꾸준히 연마해 나가라는 얘기, 곧 머리만으로 공부하기보다는 몸으로 공부해 실제 체험을 쌓으라는 거다.
경과 의를 바탕으로 한 하학상달의 묘리를 이처럼 쉽게 밝혀주셨음에도 귀 어둡고 청맹과니인 우리는 그저 헛된 문자와 언어만 희롱하며 아는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 자신 먼저 돌아볼 일이다.
쉬운 것이나 가까운 데 있는 것부터 배워서 점차 깊은 학문에 나아감이 당연함에도 그러나 대부분이 가까이 있는 것은 하찮거나 가벼이 여기고 하늘의 뜬구름 같은 고담준론만 귀히 여겨 좇으려 한다.
선생이 경계한 바가 바로 이 점이다.
"庸信庸謹 閑邪存誠 岳立淵沖 燁燁春榮"
(용신용근 한사존성 악립연충 엽엽춘영)
"언행을 신의 있게 하고 스스로 삼가며, 사악함을 막고 성심을 보존하라.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남명 선생 좌우명-
학문과 덕행이 스스로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 결과물이 현실에 제대로 적용돼 백성들에게 고루 미치지 못함을 심히 안타까워 한 남명선생.
내면의 수양을 뜻하는 경(敬)과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의미하는의(義)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아 후학을 가르친 남명 선생은 천수를 다하고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는 1572년 2월 8일로 그분 나이 72세였으며 산천재 밖에는 자욱이 눈보라 휘날렸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학문은 경의(敬義) 두 글자로 집약되는 바 이는 변함없는 진리이니 힘써 따를 것을 당부하고, 사후 칭호는 '처사'로 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선생이 남긴 <사상례절요>라는 상례 절차에 따라 제자들은 예를 다해 생전에 선생이 정해 둔 산천재 뒷산에 모셨다.
남명집, 신명사도, 남명학기유편, 파한잡기, 권선지로가 등 다수의 저작이 남아있다.
8. 임진왜란 발발 시 의병활동으로 명성 드높아진 남명의 실천 학풍
선생 사후 4년 뒤 가까이 모셨던 제자들이 덕천서원을 세워 경의 사상을 심화 확산하는 장소로 삼았다.
생전에 산천재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혼미한 정국과 그로 인해 위기가 닥칠 나라 상황을 근심하며 남쪽 바다에서 설치는 왜구를 경계해 방책을 세우고자 병술을 가르치며 묵묵히 앞날을 대비했던 남명 선생이다.
혼란스러운 이념의 충돌로 갈등 겪는 오늘날 만약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어떤 처방을 내리셨을까.
한쪽은 남북공조와 남북화해만이 민족의 살 길이라 믿는다. 평화통일이 목전에 왔다며 금방 남북이 하나 될 듯 들떠있지만, 반면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알고 살아온 반공 세대들의 계산법은 다르다.
같은 말을 쓰고 한민족이란 단순논리에 의거한 통일론만으로 과연 70년 세월 사상이 다르고 의식이 다르며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그리 쉽게 하나로 융화될 수 있을지 우려스러운 것.
더구나 핵 무장은 누구를 겨냥한 것이며 연방제의 저의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뿐 아니다. 남한 내에서도 남남갈등이라는 내홍을 겪고 있으며 정국은 여전히 불안하고 같은 정당 안에서도 서로를 불신하는 풍조가 만연해, 실제 여차하면 배를 바꿔 타 정치철새가 되는 모반도 불사하는 세태다.
명분이야 어떠하든 아무리 결과가 좋았다 해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일이나 왕건이 궁예를 제거한 당시 정황이야 일단 모반에 속한다.
박 대통령 탄핵 투표를 마치고 나오며 엘리베이터에서 김무성과 이정현이 어깨를 치며 나누던 비열하고 사악한 웃음은 무엇을 말해주던가.
배신의 아이콘이 된 유승민은 남못잖게 똑똑한 경제통으로 정계에서 알아주는 정책 브레인이었으나, 원조 친박에서 비박으로 돌아서며 배신자로 낙인찍혀 재기불능 상태로 도태되지 않던가.
저마다 말만 분분한 이 시대, 남명 선생이라면 지금 현실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비판을 하실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