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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08. 2024

행동하는 지성, 실천하는 양심 -둘-

삼동 서릿발같은 선비의 기개가 드러나다

4. 남쪽의 깊은 바다, 남명



조식 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1526년 부친상을 당하자 고향 합천에 장사 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 직접 묘비문도 짓는다.

서른되던 1531년 한성 생활을 청산하고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는데, 기실 조선 초중기까지만 해도 율곡선생이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라듯 처가살이가 기이한 풍습이 아니었으며, 집안 상속권이 아들딸 모두에게 주어졌으므로 데릴사위 제도가 흔하던 시대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에 머무는 동안 남명 선생은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덕성을 수양하며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찾아오는 유생들에게 강학을 펴면서 후학을 양성해나갔다.

산해정은 태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기상을 기르겠다는 원대한 호연지기의 발로에서 나온 이름이며 이때 남명으로 호도 정한다.

호를 취할 때 그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 나오는 '북쪽 바다의 작은 물고기 곤이 큰 뜻을 품고 붕조가 되어 남명(남쪽 깊은 바다)으로 날아갔다'는 데서 택했다.

일찍이 그처럼 원대한 포부를 안았음에도 어느 한 곳 매임 없이 훨훨 시공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는 절대 자유, 초월적 자유를 꿈꾼 남명 선생.

1537년 자신의 모친에게 벼슬길에 나서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 그는 출세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신을 갈고닦으며 오로지 제자들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학자로서 명망이 높아지자 다음 해 회재 이언적의 천거로 헌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완곡히 거절한다.

벼슬길에 뜻을 접은 그는 “안을 밝히는 사람은 경이고, 행동을 결단하는 자는 의다. (內明者敬, 內斷者義)”를 교육의 지침으로 삼아 스스로를 수양하며 제자들을 양성해 나갔다.

자신의 몸가짐이 흐트러질까 항상 방울(惺惺子)을 옷섶에 달고 경의검(敬義劍)을 허리에 차고 다닌, 칼 찬 선비였던 남명 선생. 방울소리를 듣고 늘 깨어있기 위하여 성성자를, 삿된 욕심이나 옳지 않은 생각이 일면 과감히 단칼에 자르겠다는 의지로 경의검을 지닐 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한 선비였다.  

이처럼 끊임없는 수양으로 자신의 마음을 단속해나가며 잡념을 경계하고자 남명 선생은 칼과 방울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중년기인 30대 후반에 이미 그는 "경상 좌도 퇴계요 경상 우도 남명" 이란 찬사를 받았으며 그를 찾는 유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는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유학 외에도 천문, 복서, 역학, 도가, 지리, 그림, 의방, 병법 등에 널리 통달했다.

또한 현실개혁과 의(義)의 실천을 중시해 재야에 머물면서도 중앙정치나 관료들의 불의에 맞서는 비판정신 투철한 학풍을 수립해 나갔다.

제자들에게도 책을 뚫고 현실로 나아가라며 학문에 매진하되 현실에 눈 감지 않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고 주문한 남명 선생.

조선에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더불어 울어준 유학자가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그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재야의 처사로 살면서 줄곧 위민정치를 강조하며 우국민본사상을 설파한 위대한 사상가였다.

"백성은 물과 같다 함은 옛날부터 있어왔다. 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지만 백성들이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면서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나 뒤엎기도 함을 남명은 꾾임없이 정치세력들에게 주지시켰다.

이는 진작에 순자가 남긴 말로 임금은 배, 백성은 물, 배는 물 때문에 다닐 수 있지만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는 걸 위정자들로 하여금 상기케 했다.

파당을 지은 척신들과 탐관오리가 횡행하는 세상인심을 주야로 근심하면서 왕정시대임에도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누누이 밝힌 남명 선생.

김해에서 사는 동안 그는 해안가에 빈번히 나타나 노략질 일삼는 왜구에 대한 경계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며 이에 대한 방책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1544년 적장자인 아들 조차산이 병사하자 실의 속에서 아래 추도시를 지은 이듬해에 모친상마저 당해 합천 삼가로 돌아가 장례 치르고 시묘살이를 한 후 상복을 벗은 다음, 처가를 떠나 고향으로 온 때가 그의 나이 48세 되던 해다.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 靡室靡兒僧似我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 無根無我如雲

한 평생 보내자니 어쩔 수 없는 일 / 送了一生無可奈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가 흰 눈처럼 어지럽도다. / 餘年回首雪紛紛



1남 1녀의 적장자 외에도 서자인 3남 1녀가 있었으나 당시 유교 사회의 관습상 적장자가 아니면 조상 제사를 받들 수 없었다.

하여 그는 서울에 남겨둔 집은 그의 누나에게 건네주고 집안의 상속권은 아우에게 넘겨주면서 봉제사를 부촉한다.

푸른 물과 푸른 대나무는 / 은으로 된 화살처럼 흘러가는데 / 계수나무 차가운 잎이 떨어지니 /가을이 저물었네/

양주 간에 술잔을 올려 /제사 지낼 사람 없으니/ 돌아가는 구름이 눈에 가득해도 /시름은 채워지지가 않네.

강직한 선비 남명도 하나뿐인 적장자를 잃은 뒤 이처럼 시름에 잠겨 수수해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일면을 보였다.

1545년 즈음, 더구나 을사사화로 이림·송인수·성우(成遇)·곽순(郭珣) 등 가까운 지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그는 세상을 탄식하며 더한층 은거의 뜻을 굳히게 된다.

그는 고향 합천에 거처인 계복당(鷄伏堂)과 학당인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학자 문인들과 교류하며 더불어 도학을 강론하였다.

계복당은 암탉이 알을 품듯한 집이니 그렇게 오롯이 지식을 함양해야 한다는 뜻이고 뇌룡사는 우레와 용이 깃든 집으로 장자의 '尸居龍見 淵默雷聲'에서 따왔다.

尸居龍見 淵默雷聲은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차면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세상 향해 우레같이 소리친다, 란 의미로 뇌룡정에 직접 주련으로 새겨놓은 바 있다.  

또 여기에 사람의 마음((神明)이 머무르는 집(舍)을 손수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라는 그림판이 전해진다.

경의학의 설계도로 불리는 신명사도는 눈과 귀와 입 세 관문을 뿌리로 해서 일어나는 사욕을 즉시 극복해 물리치고 나면 지고지선의 경지에 오른다는 뜻을 그렸다고 한다.

우측 문은 눈, 왼쪽 문은 귀, 정문인 대문은 입에 해당하며 강당은 마음이 머무는 집으로, 내 마음의 주인인 태일군(太一君)이 앉아있고 그 아래 경은 영의정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왕을 보좌해야 함을 상징했다.

빙 둘러 성을 쌓고 문마다 대장기를 세웠으니 이는 예가 아닌 것을 밟지말아야 하며 삼가야 한다는 의미, 국군사시직의 뜻은 임금이 나라 지킬 때 죽을 각오로 지키듯 그만큼 죽을힘을 다해 경한 마음을 지키라는 뜻.

마음이 추구하는 이념인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를 실현하기 위해 경(敬) 공부를 하되, “밥해 먹던 솥도 깨부수고 주둔하던 막사도 불사르고 타고 왔던 배도 불 지른 뒤 사흘 먹을 식량만 가지고 병사들에게 죽지 않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란 의지를 보여줘야 하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배수진 없이 '경' 공부에 맹렬히 임하라고 하였다.




5. 천 길 낭떠러지에서 내리꽂히는 폭포와도 같고 삼동 서릿발같은 선비의 기개가 드러나다.



뇌룡정 시대, 그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랄하기가 추상같은 상소문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를 1555년 조정에 올린다.

나라에 망쪼가 들었는데 시골 선비 하나 불러다 관직에 앉혀놔봐야 기실 해결될 일이 아닌 판국이었다.

“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버렸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궁궐 안의 신하들은 후원세력 심기에 용이 못에서 끌어당기듯 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 벗겨먹기를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 합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까지 이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 대왕대비 문정왕후)께서 생각이 깊다 하나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명종)는 어린 나이로 선왕의 외로운 아들일 뿐이니, 천백 가지의 재앙을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 갈래 민심을 어찌하여 수습하렵니까?”라고 피 토하는 심정으로 주상께 고하는 남명.

완곡한 표현 대신 직설적으로 정곡을 찌른 글 단성소(丹城縣監辭職疏)를 올려 외척 정치의 폐단과 비리를 통절히 비판하므로 조정엔 한바탕 파란이 일어난다.

수렴청정하는 절대권력자 문정왕후를 과부,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명종을 고아라 칭하며 대놓고 비판했으니 이는 목숨을 내걸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매서운 직언이었다.

임금인 자신보다 어머니를 능멸한 자 불경죄로 다스리겠노라 격노한 명종을 달래길, 시골의 미천한 선비가 올린 상소를 문제 삼아 닦달하면 언로가 끊긴다며 언관과 유생들이 변호해 그나마 겨우 위기를 넘기고 화를 면했다 된다.

그 당시 조정은 문정왕후 치마폭에 기댄 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정난정과 더불어 온갖 모사를 꾸미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난세 중의 난세로 사화가 연달아 일어났다.

벗들 다수를 잃은 을사사화도 그중의 하나로, 윤원형 일파가 같은 외척으로 알력을 빚던 세력을 제거하고자 음모를 꾸며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나갔다.  

바로 윗대에서 일어난 기묘사화는 조광조 세력과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훈구대신들이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문구를 나뭇잎에 꿀 발라 벌레들이 파먹게 하고는 왕에게 보이며 역모를 꾸민다고 덮씌웠던 사건이다.

연이은 사대사화에다가 밖으로는 잦은 왜구 침입과 안으로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 민심조차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남명의 일화는 왕조 실록은 물론이고 홍명희가 쓴 임꺽정에도 잠깐 비친다. 내용인즉슨 상전의 권세를 믿고 윤가 휘하 마름까지 안하무인격으로 난동을 부리는 현장에 남명이 장정 하인과 함께 있었다.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다 그들의 횡포를 목격한 남명이 하인에게 명해 나루에 닿으면 그들을 메다꽂으라고 하였다.

모랫벌에 뻗고 만 윤원형의 마름들이 돌아가 윤가에게 고하자 그는 상감조차 어쩌지 못하는 조식이라며 쓴 입맛을 다셨다던가.

해서 그를 일러 "불의를 보고 구차하게 따르지 않았고 구차하게 침묵하지도 않았다."고 미수 허목이 썼을 터이다.

그처럼 죽음 불사하며 서슴치 않고 할 말은 하는, 대쪽같이 꼿꼿하고 강단 있는 선비이자 기개 높푸른 처사로 추상같은 기상을 보여준 남명 선생.  

 

6. 바른 선비정신을 온몸으로 체현해 낸 유학자이자 교육자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ㅡ덕산 개울가 정자 기둥에 제하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 저 천 석들이 큰 종을 보게나

非大叩無聲(비대고무성) :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나지 않는다네

似頭流山(쟁사두류산) : 어찌하면 저 두류산(현 지리산)과 같이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이러한 기상과 기개를 지닌 남명 조식 선생.

논란의 중심에 선 단성소 사건으로 그는 조선 최고의 지성, 올곧은 학자의 표상이 되면서 경향 각지에 이름이 드높아진다.

실학의 거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선조 선비 중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이라는 헌사를 그에게 남기게 된다.

우암 송시열은 '선생은 나약한 선비를 강하게 만들었고 탐악한 관료들을 청렴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칭송하였다.  

오죽하면 훗날 영조 임금이 탄식하길, "요즘 선비들에게서 어찌하면 예전 조식과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정조 역시 "오늘날과 같이 퇴폐해진 풍속에서야 어찌하면 문정공과 같은 인물을 얻어 세상 다듬는 일을 맡길 수 있을까." 라 장탄식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정치 일선에 한 번도 발 담지 않고 초야에 묻혀사는 처사이지만 혼란스러운 당시 정치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남명 선생.

칼날 앞에 목 내놓고 정치 실세를 노골적으로 비판한 서슬 퍼런 결의를 보여준 남명 선생은 산천재에서 여여히 경의학을 완성해나갔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영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산천재는 지리산을 수차 오르내린 뒤 강학장소로 점찍었다가 그가 환갑에 이르러 그 산기슭에 지은 강학당, 주역에서 따 지은 이름으로 제자를 크게 키운다는 말이다.

남명 문하에는 최영경, 김효원, 정인홍, 정구, 김면, 이정, 곽재우, 김우옹 등 유능하고 젊은 유생들이 다수였으며, 도덕적 주체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 철두철미 성리학 공부를 시킴은 물론 유사시를 대비해 말 타고 활 쏘는 병법까지 익히게 하였다.

산천재 강학의 특징은 유학의 문장을 세세히 해석해 주는 강론이 아닌, 큰 틀의 학문탐구 방법을 제시해 준 다음 학습자 스스로 깨치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주입식이라기 보다 자유로운 토론식이었고, 관념의 세계에 매몰됨을 경계하며 늘 깨어있으면서 현실을 바로 읽으라 주문한 남명 선생.

제자들에게 그는 항상 앎에 그치지 말고 실천하라, 불의에 타협하지 말고 정면으로 비판하라, 끝으로 경의의 바탕 아래 유교의 목표인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이루라고 강조 또 강조하였다.

하여 그의 후학들은 스승이 가고 난 20년 뒤 임란이 터지며 왕이 몽진을 떠나고 조정 신하들이 앞다퉈 도망치는 등,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선비이되 분연히 칼을 들고 구국의 선봉에 나서는 의병장 다수가 배출된다.

양반과 상민 계급이 상하로 뚜렷이 양분된 조선시대, 양반 자제만 할 수 있는 글공부에 매진한 유생들이 칼을 들었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기실 임진란이나 병자호란 당시 가난한 민초들이나 싸움터에서 죽어갔지, 글방 도령이나 대감집 아들은 거개가 부모 후광 덕에 일찌감치 난을 피할 수 있었기에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 대대로 무탈할 수 있었다.

그때만인가, 한국동란 당시도 그랬고 현재도 고위층이나 지도층 자식들은 얼렁뚱땅 군 복무도 얼버무리고, 미국으로 영국으로 귀신처럼 빠져나가 슬그머니 잠수를 타지 않던가.

허나 이스라엘에 전쟁이 나면 유대계 해외 유학생들은 기꺼이 조국으로 돌아가 총을 잡겠다 하였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명문 이튼스쿨 졸업생 중 80%가 참전해 전사자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육이오 때도 미군 장성의 아들들이 자진해서 한국전에 뛰어들어 목숨 잃은 젊은이가 많았다는 사실, 정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다수 위에 서있는 사람은 모름지기 대의명분을 따라야 함에도, 전쟁 때마다 성리학자 가득한 한양성은 쉬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관료들은 몽진하는 임금도 내팽개친 채 제각각 살길 찾아 달아나기 바빴다.

반면 경을 알고 의를 아는 자는 익힌 바 몸소 실천에 나서서 일신 돌보지 않고 나라를 지키려 선봉이 섰음이니.

조선 교육사를 쓴 이만규는 "남명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교육자"라는 평가를 하는데 그가 가르친 실사구시의 정신교육에 후한 점수를 놓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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