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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08. 2024

행동하는 지성, 실천하는 양심 남명 선생ㅡ하나

산천재 고매(古梅) 꽃잎 피는 날

1. 산청 지리산 자락 산천재 고매(古梅) 꽃잎 열리거든


필연이듯 우연이듯 미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경남지방을 여행하는 중에 남명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진주에서 약간 떨어진 산청, 선비의 고장으로 알려진 그곳에는 백성들의 곤고함을 긍휼히 여긴 선대들의 유서 깊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산청(山淸)은 문자 그대로 '산이 맑은 동네'로,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인 지리산 천왕봉을 품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능이 금서면 왕산(923m) 기슭에 기이한 돌무덤 형태로 남아있다.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기도 한 그는 가락국의 제10대 왕으로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불린다.


신라 법흥왕 19년 군사력 미미한 가야에 막강 신라군이 침공해오자 백성만 다치고 상한다며 구형왕은 진작에 투항키로 한다.


그 후 시조 김수로왕이 별궁으로 지어놓은 수정궁 터에서 오 년을 지내다 눈을 감으며 돌무덤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으로 조상 뵐 면목이 없으니 흙 대신 돌로 무덤을 만들라 하였다는 그.


구형왕릉에는 신기하게도 새가 날아들지 않으며 짐승이나 칡덩굴조차 왕릉 돌담에 이르면 피해 간다고 한다.


또 한 곳은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재배했던 ‘목면 시배유지’다.


고려 시대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이 땅에 최초로 목화씨를 심고 가꿔, 추위에 떨던 백성들에게 따뜻한 무명옷으로 겨울을 나도록 돕게 한 장소이다.


잘 다듬어진 시배지에 들르면 면화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베틀과 물레를 관람할 수 있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법어로 잘 알려진 성철 스님 생가도 이 근처이고 유의태가 가난한 백성을 돌보며 의술을 편 곳도 이 근방이다.


그 무엇보다도 산청에는 영남 지방 정신문화의 뿌리인 남명학파가 깃들어 크게 성장한 지역으로 이름 높다.


남명 조식 선생은 성리학의 이론에 치중하지 않았으며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을 펴나가면서 특히 제자들에게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던 분으로 남명집, 사회개혁론, 경세론 등 저서 통해 후세 실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남명 사상의 핵심인 경(敬)은 임금 앞에 서있듯 오롯이 집중한 상태를 말하며 자기성찰을 통해 스스로 마음 밝혀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고, 의(義)는 옳은 일이면 행동을 결단해 마땅히 실천하려는 의지를 이른다.


경은 곧 안으로 마음을 밝혀 올바르게 성찰하는 것, 의는 이런 성찰을 통해 과단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것.


조선 중기 실천 성리학의 대가로 <경과의>를 사상의 바탕으로 삼은 그분은 사화 시대에 무너진 선비의 기상을 바로 세우셨다.


잘못된 국정을 비판하여 사림의 언로를 열었으며 곤궁한 백성을 먼저 걱정하여 위민정치의 방도를 강구했던 분이시다.


이 시대가 그 정신 필히 되살려 모범으로 삼아야 할 남명 조식 선생. 일생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지조 있게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으로 한 평생을 지낸 대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


퇴계 언행록에 남아있듯 학문의 목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따라서 자기 수양을 하고 백성을 다스리려 출사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 여긴 퇴계는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니며 어찌 군신 사이의 큰 윤리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관직 권고 서신을 남명에게 보낸다.


남명집 담 퇴계서에 보면"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도둑이거늘 하물며 하늘의 물건인 관직을 훔치는 게 도둑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에둘러 말하지만 아주 까칠하게 응수한다.


학문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론보다 실천이라고 강조한 남명(南冥) 조식 선생은 성리학 이론 탐구에 주력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함께 당대 영남 좌, 우에서 쌍벽을 이룬 성리학자였다.


벼슬을 마다하고 참된 처사(處士)의 삶을 일관했던 남명 선생에 반해 퇴계 선생은 정치 일선에 나섰다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서로의 학풍을 인정하고 존중한 두 석학은 동시대를 산 맹자와 장자가 만난 적 없듯이 한 번도 대면한 적은 없었다.


다만 꾸준히 편지왕래만 있었는데 격렬한 논쟁을 자주 벌인 퇴계 선생이 먼저 세상을 하직하자 남명 선생은 애석해 마지않았다 한다.


그러나 후일 “내 비석에는 처사라고만 쓰라”는 퇴계의 유언을 듣고는 “할 벼슬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 했다는 남명 선생의 말속에서 가시가 느껴지기도.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의 이론 공부에 치중한 퇴계 선생과 달리 학문 궁구와 더불어 앎의 실천 문제에 관심이 집중됐던 남명 선생, 두 거장의 학문탐구 방향이 이처럼 서로 달랐기에 끝끝내 그 거리는 좁혀질 수 없었나 보다.


또한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나 불행스럽게도 후일 그의 제자들도 이황의 문도들과 사상 차이로 대립하여 당쟁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2. 덕산에 터를 잡고서(德山卜居)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春山底處無芳草)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只愛天王近帝居)


빈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을 건가 (白手歸來何物食)


십리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十里銀河喫有餘)



산천재는 남명이 61세 되던 해인 1561년 지리산 덕천으로 옮겨와 지은 마지막 거처다.


멀리 천왕봉이 푸르게 건너다 보이고 앞으로는 덕천강 유유히 흐르는 산청군 시천면 덕천은 문외한의 안목으로도 명당처답다.


산천재의 산천은 주역에 나오는 구절로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인간 세상 일을 배워 이로 하늘의 이치를 통한다.'는 말로 부동의 마음으로 학문 닦아 자기 역량을 무한히 확대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산천재,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자 하늘을 품은 산이란 당호에는 덕을 쌓으며 제자를 기르는 곳이란 뜻도 담겨있다.


남명 선생이 58세 때 쓴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합천 삼가를 출발해 배를 타고 남해바다를 지나고 섬진강 거슬러 올라 쌍계사와 신흥사 일대를 유람하며 선인들의 유적을 차례로 방문해 그들의 충절과 절의를 새겼다는 글이 나온다.


이때가 열두 번째 지리산 탐방일 정도로 지리산을 늘 흠모의 정으로 마음에 품었던 남명은 나이 들어 천왕봉을 매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터를 잡기로 한다.


그 얼마 후인 환갑 해를 맞아 그는 산청군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여생을 여기서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다가 눈을 감는다.


문하에서 홍의장군 곽재우, 김민, 정인홍 등 50여 의병장이 배출되는데, 그들은 스승께서 실천하는 학문을 하라는 가르침대로 훗날 국난을 당했을 때 구국의 선봉에 서게 된다.


산천재에는 벽화로 세이공청(洗耳恭聽)의 고사가 그려져 있다.


요(堯) 임금이 천자의 위(位)를 영수(潁水) 가에 숨어 살던 허유(許由)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허유는 은자(隱者)인 자신의 본분대로 살겠노라 거절하고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영수(潁水)에서 귀를 씻었다.


마침 이때 소부(巢父)가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 더러운 물을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상류(上流)에 가서 물을 먹였으며 허유는 기산으로 숨어버렸다는 상고시대 고사다.


지을 당시는 작고 조촐한 한옥이었다 하나 지금은 기와를 얹었으며 뜰에는 450년 된 남명매 고매되어 뜰 가득 암향 적신다는데.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의 하나인 매화는 선비의 곧은 절개와 기상을 상징함이니, 삼동설한풍 견뎌내고 올봄 남명매 꽃잎 열리는 날 필히 찾아보고 싶은 산천재다.




3. 남명, 스물다섯에 출세간의 포부를 내려놓다



남명은 연산군 7년에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선조 대까지 산 조선 중기 유학자다.


72년을 사는 동안 다섯 임금을 섬겨야 했으니 이는, 중종반정도 일어났었고 그 뒤를 이은 병약한 인종이 겨우 9개월 재위에 있었던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세월이 수상하고 험한 까닭도 한몫했으리라.


아다시피 조정에는 피바람 그칠 새 없었던 격동기, 외척의 발호와 파벌 간 당쟁 싸움으로 바람 잘 날 없던 시국, 이미 도(道)가 실종된 세월이라 벼슬살이도 외줄 타기 하듯 해야 하는 혼돈기였다.


그는 시국 어수선한 조선 중기인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톨이 토동에서 부친 조언형과 모친 인천 이씨 사이의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숭문관 판교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합천 삼가현의 유력한 사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그의 외가였는데, 닭띠 해에 그 집에서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던 차 친정에 와있던 어머니가 마침 그를 낳았으며 본가는 합천군 삼가면 판현이었다.


다섯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다가 이후 부친이 과거에 급제 한 후로는 한양에서 살게 된다.


한성부에서 소년기를 보내며 책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기던 그는 이윤경, 이준경, 이항 같은 친구들과 학문을 논하며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한다. 이 무렵 대곡 성운을 만나 둘 다 처사로 살면서 평생을 교류한다.


1518년 그의 나이 18세 때 부친이 함경도 단천 군수로 부임하자 그곳에서 생활을 하기도 하나 주로 한성에서 청년기를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죽임을 당하고 숙부 조언경이 파직당하는 걸 목격하자 벼슬살이의 위태로움을 체감한다.


그럼에도 그는 다음 해인 152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며 22세 때 김해의 토호 집안 규수인 남평 조 씨와 결혼한다.


1525년 그의 나이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다가 송대 학자인 노재 허형이 쓴 다음과 같은 구절에 깊이 공감하며 크게 깨우친다.


“.... 벼슬에 나아가면 성취하는 일이 있어야 하나 초야에 처해있으면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살이에도 이루는 일이 없고 초야에 처해서도 지키는 바가 없다면 뜻한 바와 배운 바를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풀이하자면 벼슬에 나갈 시는 유익한 일을 해야 하고 초야에 묻힌다면 지조를 지키고 살 수 있다, 란 뜻이겠다.


이를 계기로 입신양명을 위한 학문 연마가 아니라 다양한 독서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갈고닦아 진정한 선비가 되는 길, 올곧은 처사가 되는 길로 나아갈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때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란기, 사화로 얼룩진 혼미스러운 정국이었으니 자칫 탁류에 휩쓸려 이름이나 욕되게 할 뿐.


벼슬에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임을 명철히 판단한 점에 더해 자신의 직선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감안했음인가, 그는 초야에 묻혀 살며 의연한 지리산을 닮고자 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 매몰돼 이론에만 치우치므로 관념적 사변에 빠져 있기 일쑤였다.


이에 그는 공리공론일 뿐인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두었으며 불교와 노장사상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세상의 이치와 진리를 깨닫기 위해 유교만 고집하지 않고 여러 학문을 연구하고 섭렵한 끝에, 그는 결국 모든 학문이 다 진리에 통하는 길임을 알아채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황은 당시 이단으로 취급하던 노장을 다루는 그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라고 비판했다.


한편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한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을 훔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도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더하기 빼기 외의 인수분해가 별로 필요치 않듯, 이기(理氣) 논쟁이 자신의 수양과 백성들 살림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국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인이라면 한가롭게 논할지 몰라도 벼슬살이하며 왜 그런 논쟁이나 일삼는가? 그는 탄식해 마지않는다.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이지만 좋은 말과 글이 없어서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나? 성리학은 이미 주자 정자 대에 완성됐거늘 이론을 재탕 삼탕 우려먹으며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유학자들에게 학문은 '쓸모'가 있어야 한다며 실학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남명.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은 곧 입에 발린 이치이며 자신을 돌이켜 보지 않고 들어서 아는 것만 많은 것은 곧 귀에 걸린 학문이라고 못 박으며 그는 사변적 관념에 사로잡힌 성리학자들을 규탄한다.


이언적과 이황 등에게 훗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자의 말씀을 배우고 교훈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이 사화에 동조하고 휘말리느냐?."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한다.


학문을 현실에 적용시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 삶에 실제적인 혜택을 주어 복되게 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역설한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퇴계 이황과 동년배로 영남 사림의 양대 축을 이룬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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