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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Oct 05. 2024

열절(烈節)한 정신의 충무공을 기다리노니

"살을 에이듯이 추운 날이다. 옷 없는 병졸들이 움츠리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다. 군량은 바닥났다. 군량은 오지 않았다. 영남의 여러 배에서 격군과 사부들이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 참혹하여 들을 수가 없다. / 정유재란이 승리를 거둔 그해 10월 14일 아산에서 아들 면이 죽었다. 이순신은 허벅지와 어깨에 적의 칼을 받고 혼자서 죽어갈 때의 면의 무서움을 생각했고, 산 위에서 불타는 집을 내려다보던 면의 분노를 생각했다. 쓰러져 뒹굴며 통곡하는 늙은 아내를 생각했다. / 칼을 코에 대고 쇠비린내를 몸속 깊이 빨아들였다. 이 세상을 다 버릴 때까지, 이 방책없는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이 방책없는 세상에서 살아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김훈의 칼의 노래 본문에서 발췌>



단문체 연습을 해보고자 펼쳐 들 때마다 도처에 나오는 이런 구절들에 목울대 뜨거워지게 만드는 책이외다. 많은 분들이 진작에 소설 '칼의 노래'를 읽었을 터. 그도 아니라면 최소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를 외우지 못할 리 없을 거외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풍전등화 같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지켜낸 성웅 이순신 장군과 그분이 남긴 <난중일기>를 모를 리 없으리이다. 임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칠 년간의 기록인 국보 79호 난중일기는 지난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된다오.



어느 시절이나 세월 수상쩍고 세상 극도로 어수선한 난세일 때 영웅이 나타나고 충신도 등장하는 법. 국가가 있어야 국민도 있으니 제 나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야 누군들 뜨겁지 않으며 절실하지 아니하리까. 각자 생각과 방향과 길이 다르다 뿐이지 지향점이야 한결같은 것. 보수나 진보, 좌나 우, 모두가 바탕에 깔린 건 내 조국에 대한 진한 애정이리다. 어리석고 못난 부모라 외면할 수 없듯이 국정운영 능력이 미숙해 모자라는 짓만 골라하는 저간의 사정 답답하나 그럼에도 아껴 보듬고 지켜내야 할 내 나라 아니리까.




한국에 돌아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엄마 유택이었소이다. 두 번째는 같은 아산이라 자연스럽게 길 이어져 이충무공께서 영면에 드신 자리를 참배하게 되었다오. 현충사는 여러 번 가봤으나 묘역은 초행길.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라는 주소지 대로 네비 따라서 찾아갔다오. 고개 숙인 벼 묵직이 출렁대는 논길이며 콩밭 무성한 밭길 이어진 한적한 농촌 풍경 속을 한참 달려갔소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광은 잊혀가는 예전 외가 마을처럼 살갑고 푸근하기만 하였소. 머릿수건 동여맨 아낙이 새참 소쿠리라도 이고 걸어올 것만 같은 환각에 슬쩍 미소 일더이다. 참으로 좋은 계절. 들판은 황금빛인 데다 온갖 과일 무르익어 농가의 가을은 마냥 풍요로웠다오.

정조 어제 신도비 상층부

저만치 기상 남다른 울창한 솔숲이 보이자 순간 느낌이 와닿았소. 아무렴, 충무공께서 영면에 드신 곳이니 기운이 달라도 어딘가 다르겠지. 운치있게 쭉쭉 뻗은 적송 밀밀한 숲 사이로 길은 곧게 나있었소. 숲길에 우뚝 선 홍살문 우측 조붓한 골짜기엔 벼 익어가는 논이 따르고 좌측은 짙푸른 솔밭. 공중촬영을 해보면 색채대비만으로도 그림 훌륭하겠다 싶더이다. 그렇소이다. '훌륭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능력과 업적 등이 매우 뛰어나 대단한 걸 이른다오. 그처럼 역사가 증명하듯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무관이되 인품과 학문 훌륭히 쌓아 덕 높으신 명장. 따라서 불세출의 영웅으로 기림 받아 마땅하신 분이라오. 나라가 어지러운 이때 절실히 찾게 되는 구국의 영웅. 세상 극도로 어수선한 난세일수록 영웅 나타나고 충신이 등장하는 법. 다시금 충무공 넋 환생하시어 이 땅 부디 지켜주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 바쳤다오.



사적 제112호인 충무공 묘역. 고른 금잔디 부드러이 깔린 경내는 산새 소리나 들릴 뿐 깊은 산속처럼 아주 고요했소. 깔끔하게 다듬어진 드넓은 잔디밭 맨 위 중앙에 봉긋 솟은 묘소 감싸듯 낮은 돌담채가 둘러섰더이다. 그 앞 양옆으로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알맞게 석물이 서있었소.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했소이다. 근자 무슨 유행 바람인지 웬만한 집안의 가족묘도 온갖 석물로 요란스레 치장한 경우를 도로변에서 가끔 스쳤더이다. 그에 반해 충무공 묘역이 보여준 간결 정갈함은 그래서 더 돋보였소. 거기서 유독 시선을 끌던, 새까맣게 윤기나는 오석의 이충무공 어제(御製) 신도비. 이는 1794년 정조가 손수 충무공 뜻 기리는 내용을 지어 비문에 새겨서 세운 비석으로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었소. 그 외에도 예서체로 깊이 음각된 비석문은 내용 모르지만 눈길 이끌더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뼛속으로 추위 매섭게 파고드는 겨울 바다. 노량해전에서 눈 감으신 충무공 유해는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인 고금도를 거쳐 아산 금성산으로 모셔졌다 하오. 순국 16년 뒤인 1614년 현재의 자리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부인과 합장했으며 묘역을 관리할 재정 확보를 위해 토지도 묘역 아래 마련했다 하오. 올라오면서 본 우측 편 연못 아래 길쭉한 삼각형 땅, 황금물결 이루고 있던 논이 아마 그렇지 싶소이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이 땅이 경매에 넘겨지자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기금 모금운동이 일어나 땅을 되찾았다 하더이다. 이곳은 1959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으며 충무공 종손의 동의를 얻어 지금은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에서 묘역을 관리하고 있다 했소이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세상이 혼돈스러운 때일수록 절실해지는 그 무엇이 있더이다. 우리 스스로 이끌어가고 만들어 나갈 수 없는 미래임에 무력감이 들지만 말이외다. 비록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힘의 한계가 느껴져 자괴감에 빠지게 되기도 하오만. 아무리 세계 10위권의 경제 선진국이라 하나 아직도 민도는 그 지수에 발맞추지 못하고 귀만 얇아 쉽게 흥분하며 좌충우돌. 몇 년째 가까이서 세상 돌아가는 이 아수라판을 보노라니 정말이지 한심 무인지경, 분노가 끓더이다. 파렴치범 수준인 위정자들 작태하며 공정을 무너뜨리고 거짓 일삼는 모리배들이 횡행하는 나라. 게다가 권모술수와 조작에 능한 오염된 정치꾼들 준동하는 세상. 열절한 정신으로 오로지 이 나라 미래를 생각하며 국기 바로세우려는 기개로 살신성인하겠노라는 제2의 충무공을 절박하게 기다리나이다.



대한민국은 국이라는 대국과 북한을 머리에 이고 살며 여전히 지정학적 운명 타령이나 해야 하는 나라. 하긴 지정학이 실질적으로는 이데올로기보다 힘이 더 쎄다고 합디다. 그렇듯 미, 중, 일  틈바구니에서 무엇 하나 자주적으로 일구어 낼 수 없었던 민족사의 비극을 안고사는 우리라오. 얼떨결에 맞은 광복이 그러했고 어정쩡한 한국전쟁 종결이 그러했듯 지금도 한반도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건 최종적으로 우리 힘이 아닌 것 같소이다. 특명을 받은 헤이그 밀사도, 삼일운동 도도한 물결도, 상해임시정부도,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겨졌을 따름. 불세출의 영웅으로 기림 받아 마땅한 분 충무공이시여. 울돌목 조류 십분 활용해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건졌던 명량대첩의 쾌거 이뤄낸 불멸의 넋이시여, 다시 임하소서! 그래도 하느님께서 보우하시는 대한민국이니 다시 한번 하늘의 묘한 섭리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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