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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Oct 05. 2024

어쩔 수 없었다고?

지난 연휴 마지막 날 산에서 내려오다가 S자로 트는 커브길에서 청설모를 치었다.

눈 깜박할 새에 벌어진 찰나의 일이다.

무심결에 발아래 밟히고 마는 미물들을 살리고자 예전 스님들은 짚신 성글게 삼아 신었다.

그러고도 주장자 앞세워 탁탁 신호를 보내며 걸었다더니만 이런 우발적 사고를 막기 위함이렷다.

도로를 잽싸게 가로지르는 청설모를 보았으나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이는 꼬리를 문 차량 행렬이 줄지어 뒤따르고 있었던 까닭이다.

어쩔 수 없었어,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비명횡사한 청설모를 위한 화살기도를 잠깐 바쳤다.

실제 그런 경우가 수두룩하다.

인과응보의 당연한 귀결이거나 죄에 상응하는 벌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연에 의해 억울한 일을 맞는 경우.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뜻밖의 불똥이 튀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당하기도 한다.

뚜렷한 잘못 없이 아지 못할 어떤 힘에 의해 엉뚱한 피해나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역사의 수레바퀴에 끼어 어처구니없는 수난을 겪게다.

체로키 부족의 눈물의 길 종착점

특히 약자에게 가해지는 힘센 자의 무자비한 폭거는 유사 이래부터 죽 있어왔다.

로마나 이집트에 끌려온 노예들의 신음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강제로 엮여온 흑인들의 비극과 닿아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걸어야 했던 '눈물의 길'은 오늘날 세르비아, 코소보, 르완다의 인종청소로 이어졌다.

황금에 눈먼 스페인 군대가 잉카문명을 흔적 없이 쓸어버렸듯이  대영제국은 하고많은 식민지에서는 물론 아일랜드에 어떤 패악을 저질렀던가.

누군가를 작정하고 괴롭히고자 한 것은 아니라 한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읽어보면 그처럼 이성적/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광기에 의한 희생자들이 수없이 생겨났음을 목도하게 된다.

영화 <종달새 농장>은 오스만제국 때부터 박해받은 아르메니안들이 무수히 희생당한 사실에 근거한 논픽션이다.

근세 들어 나치의 홀로코스트 다음으로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벌였던 터키에 의해 1백만 이상이 처참하게 죽어간 내용을 담았는데 볼 만한 영화다.

상명하복의 명령체계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독재체제의 군대 제도에 의한 횡포도 무지막지하다.

하지만 무조건적 반감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지면 보통 사람도 어느 결에 눈이 벌겋게 충혈되며 인성마저 마비되고 황폐해진다.

LA 밸리나 글렌데일 쪽으로 아르메니안들이 몰려사는 모양이다.

그런데 지인 하나가 그들의 품성에 대해 비판하며 혐오스러워하는 얘길 한 적이 있다.

기나긴 세월 수난당하며 산 피해의식에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던 그들만의 모진 안간힘 때문이겠구나 싶어 이 영화를 보며 짠해졌다.

강제이주 당하는 종달새 농장의 한 장면

요즘은 인터넷 덕에 좋은 영화를 취향대로 골라볼 수가 있다.

영화가 갖는 문화적 의미, 그리고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 보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찾아본다.


그렇게 수 차례 보고 또 본 영화는 히치콕의 작품들, 오손웰스의 시민 케인,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 타운, 카사블랑카, 위대한 유산,  Cannery Row, 앵무새 죽이기,  에덴의 동쪽, 그 외에도 바그다드 카페나 서편제, 화양연화 역시 보고 또 봤다.


즐기는 영화는 주로 고전 역사물, 누아르 영화나 스릴러물도 좋아하나 액션물과 무협영화는 영 별로다.


판타지물이랑 좀비 영화는 거의 안 보고 전쟁/역사영화나 호러며 멜로 영화는 단골이지만 에로물은 사절이다.  ㅎ

요 며칠 한 가지 주제에만 집중해보자 싶어, 끝도 없이 우려먹는 소재인 나치 고발 영화를 계속 보았다.


25시, 세계 2차 대전, 신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 등을 찬찬히 재음미하다 보니 과연 성선설이 맞기나 한지 의아해졌다.


무엇에 의해 인간이 인간에게 그리 냉혹해질 수 있는지 참담스럴 지경이었다.

나치 폭거에 6백만이 죽어간 유대인, 일본이 행한 난징대학살도 인간 잔혹함의 극치였다.

우리나라 역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피 흘려 항거한 선열들의 예는 하도 많아 일일이 열거조차 할 수 없다.

일제 만행은 그뿐만이 아니라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6천여 명이 한자리에서 무차별적으로 피살됐다.

영국에서 만든 레일 로드맨(Railroad Man)이란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태평양전쟁의 한복판에서 포로인 영국군에게 가한 일본군의 야만적 폭력과 고문행위를 통렬하게 고발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며 치가 떨렸으나 패륜적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 헌병 장교는 훗날, 시대의 광기에 그저 휩쓸려갔을 뿐이었노라며
통렬한 참회 없이 무덤덤하게 회고하였다.



제목이 레트리뷰션(Retribution)인 영화를 봤다.

과연 무엇에 대한 응징일까 궁금해서였다.

스페인에서 만든 스릴러 영화로 내용은 진부하나 긴장감은 꽤 들었다.

학교 가는 자녀를 태우고 출근길에 나선 투자은행 지점장은 차 시트 아래 폭파 장치가 되어 있다는 폭파범의 협박전화를 받는다.

금융상품에 투자했다가 전 재산과 아내를 잃은 남자의 보복극이라는 뻔한 스토리이긴 하다.

그런데 범인과 통화 중 절망에 빠져 외친 지점장의 한마디가 계속 뇌리에서 맴돌았다.

당신이 파탄에 이르게 된 건 내 실수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고, 자신은 상부의 지시와 명령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아니 최종 책임은 아무도 떠맡지 않는 상황이 되는 경우가 의외로 허다하다.

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큰 물살에 떠밀려가게 하는 제국주의 체제나, 집단 최면에 빠지게 만드는 독재 치하나, 불온한 선동적 붉은 사상이나, 절대적인 힘의 정체가 보이지 않는 조직의 상부 하달식 명령체계 등등.

중국 문화혁명기를 휩쓴 청년들 광기는 무지막지하였고, 오늘날 북녘 괴뢰집단의 일사불란함은 오싹 한기가 든다.

권력과 금권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제국주의 명령과 사회주의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 올가미에 걸려 최면상태로 마비가 되면 지식인조차 꼼짝없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르는 쥐 꼴이 되는데...

여전히 불씨를 안은 화약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쟁을 보거나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 빚는 유혈사태를 보면 과연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회의감이 깊어진다.

그들도 다 어쩔 수 없어서 그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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