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이 되면 큼직하니 참한 화분 몇 개를 구하려 한다. 집에 있는 허름한 빈 화분을 쓰기에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서이다. 이왕이면 태깔 맑은 사기분이 좋겠다. 금이 잘 안 가는 질 좋은 화분이 필요한 까닭은 차 씨앗을 심기 위함이다. 귀한 나무를 키울 자리로서도 그러하지만, 그보다는 차 나무란 한 번 뿌리내리면 옮겨심기 상그럽다지 않는가.
평소 나는 녹차를 즐기는 편이다. 까다로운 다도에 매임 없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그냥 마시는 무격식이 내 격식이다. 차를 즐기면서도 실제 차 나무는 본 적이 없었다. 채다 소식을 듣는 곡우 무렵엔 쌍계사 인근 야생 차밭이며 보성다원이 무척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태껏 다원은커녕 차 나무조차와도 상견례를 치르지 못했던 나. 봄볕 아래 몇 번 찾은 화개에서도 그 나무는 멀리만 있었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 그날은 통도사를 창건하신 자장율사의 대재일로 해마다 개산대재가 봉행된다. 아울러 부처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 친견식이 병행돼 불보 대찰 통도사로서는 큰 행사 날이다. 동참의 기회를 몇 해째 놓쳤는데 작년엔 S 스님으로부터 미리 연통받고 이른 시각 영축총림 일주문을 들어섰다. 향연 속에 연등 나부끼고 영산회상, 회심곡 소슬한 가락 따라 파르라니 더 높아가던 벽공.
취서산은 단풍이 한창이었다. 적멸궁 뒤편, 굳게 문 잠갔던 사리탑 경내가 개방되어 참배객은 끊임없이 탑돌이를 한다. 네모반듯한 기단부 칸칸에 정교한 불보살 조각이 돋을무늬로 새겨져 있고 이층의 석단 위엔 종신을 닮은 사리탑이 한가운데 올연독좌했다. 무늬 진 바위 이끼 떨구고 그 석종에서 뭇 중생 깨어나라 깨어나라, 울릴 듯한 종소리.
석가모니를 염송하며 탑 가장자리 따라 돌고 또 돈다. 얼마나 돌았을까. 문득 환영처럼 눈을 끄는 흰 꽃 무리. 사리탑 감싼 담장을 빙 둘러 나지막이 서 있는 상록수에 하얀 꽃이 벙싯거린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마치 산다화 같다. 단지 꽃이 좀 작고 잎새가 갸름하다. 사리탑 모시는 꽃이라면 차 나무가 아닐까 싶었다. 신라적 충담스님은 남산에 올라 미륵존불께 차 공양드렸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도 있거니와 차는 향이나 초 꽃과 함께 불전에 올리는 공양물이다. 나무 그늘에 떨어진 꽃송이와 목화 다래같이 생긴 열매 하나를 주웠다. 장소가 장소이니만치 불경스레 나무에 손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상컨대 차 나무는 구기자나무 비슷하리라 여겨왔다. 아마도 이른 봄에 따내는 연하디 연한 새순의 새잎, 작설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참새 혀만큼 아주 조그만 잎만을 염두에 두었으니 야생 동백처럼 뻣뻣해 보이는 잎새의 나무가 차 나무이리라 쉬 추정 못함도 무리는 아니었다. 뒤늦게 그 나무가 차 나무임을 확인하고는 소중한 보물을 얻은 기쁨에 나는 듯이 돌아왔다. 전혀 뜻밖의 선물인 사리탑 경내에서 얻은 차의 씨앗. 어찌 예사 인연이랴 싶다. 차 나무와의 조우, 그 소망에 답해 주신 도타운 불은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날 이후 내 심전에는 차 나무가 자라났다. 이미 기호품으로서의 차가 아닌 뾰족이 눈엽 키우는 차 나무가 내 일상 한가운데로 들어선 셈이다. 풀과 사람과 나무가 어우러진 茶란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내가 방초 푸르른 새봄의 자연 속에 든 기분이 든다. 어제, 바람 맑고 햇살 다사로운 아침. 다래 송이 같은 그 열매가 저 혼자 벌어져, 잘 여문 씨앗 세 개를 떨구어 놓았다. 마치 껍질채인 헤이즐넛과도 닮았고 동백 씨와도 비슷하다. 이 씨앗을 심기 위해 먼데 있는 봄이 벌써부터 기다려지고 질 좋은 화분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다행히 씨앗 셋 모두 싹 틔워 세 그루 차 나무가 자라면 분 하나는 딸 몫이고 또 한 그루는 아들도 주리라.
태어난 땅을 옮겨가지 않는 특성이 있으니 심을 때 특히 자리를 신중히 가려야 한다는 차 나무. 그래서 남도 어느 지방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차 씨앗을 넣어준다고 들었다. 한 번 맺은 인연 소홀함 없이 굳게 지키라는 정절의 당부이며 절개의 의미일 터이다. 선풍옥골이라 칭함 받는 차 나무의 귀태도 귀태이거니와, 변치 않는 충절을 느끼게 하는 푸른 상록수라 더 반가운 차 나무. 반음 반양을 택하는 중용 정신도, 자갈밭이나 사질의 토양에 즐겨드는 검덕도 맘에 든다. 진정 차나무야말로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었다.
그러나 중용이니 검덕은 고사하고, 경조부박한 처신으로 자주 실수하고 곧잘 후회하는 나. 헤프게 말 내뱉음도, 가벼이 사람 사귐도, 심지어 마구잡이로 물건 사들이는 일까지 나이 들수록 오히려 조신을 잃어간다. 더구나 글조차 깊은 생각 없이 함부로 써내리는 나의 경박함이라니. 차 씨앗 묻기까지의 마음 자세 되새기며 매사 신중치 못한 자신을 다스려야 하리라. 그리하여 차나무 곁에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자리 가릴 줄 아는 분별을 배워야 하리라. 더불어 사철 청청한 차 잎, 거기에서 우러나는 은은한 빛과 향 닮은 삶을 꿈꾸어 보리라. <수필공원 ·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