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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Oct 26. 2024

다만 혼자

바람 몹시 불던 봄의 끝머리. 국도를 따라 산청 가는 길목 어디쯤에선가 그 나무를 만났다. 야트막한 잔솔밭 등성이에 우뚝 선 큰 소나무 한 그루. 서로 어깨 비비듯 소곤대는 잔소나무 숲에 혼자 어이 저리도 멀쑥 커버렸을까. 어찌하여 그 많은 일월과 풍상 단지 홀로 맞고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의아하기 조차했다. 명징한 쪽빛 하늘 배경 삼아 잘생긴 몸체 윗동을 바람결에 맡기고 서있던 노송. 오기 또는 통한 같은 처연함이다. 청청한 기백 단아한 자태 깊숙이 가라앉은 절체절명의 외로움. 혹은 네가 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너만의 아픔 같은 게 전해진다. 아니면 고향 언덕 바위 위에 서서 어여 가라고 손 사래질하는 어머니 모습이 그러할까.



  교향악단의 바이얼린이나 비올라처럼 고만고만한 음색으로 다정다감한 무리 중에 어쩌다 한번 폭발적인 힘으로 솟구쳐 오르는 심벌즈 소리를 연상시키는 노송. 그랬다. 산등성이 큰 소나무에서는 챙- 하고 심벌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우러짐 밖으로 튕겨 나오는 단 혼자의 고독한 울림. 그러나 한주먹에  K·O 시키는 권투선수의 위력적인 펀치인 양 힘차다. 쩌르르 전율마저 일게 하는 한편 가슴이 다 후련해지는 심벌즈 소리. 그 소리에 번번이 나는 맥을 못춘다.



  음악회 티켓이 주어져 몇 번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한낮의 평상복을 벗어두고 저녁나절 한때나마 우아한 기분에 젖어보는 것도 꽤 멋스러운 일이다. 도회의 소음이 고즈넉이 잦아드는 초저녁. 문화회관 돌층계를 오를 즈음엔 마음까지 같이 고조되곤 한다. 회전문을 밀고 로비에 들어서면 길게 늘어진 샹들리에 휘황한 불빛에 좀 더 가슴이 들뜬다. 엷은 흥분기를 누르고 객석에 앉는다. 천장과 벽의 조명이 차례대로 꺼지고 무대에만 집중되는 빛 사이로 막이 열린다. 이윽고 지휘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섬세하게 때로는 장중하게, 그와 동시에 유려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여울지는 음률.



  음악은 세계 공통어라 했던가. 그중에도 음색과 음역이 각기 다른 악기를 한데 묶어 편성한 관현악단의 연주는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은빛 조수처럼 스며드는 아름다운 음악에 잠겨드노라면 나는 잠시 천상의 시인이 된다. 번다한 세간사 잊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축복 그 자체 아니랴. 음악 속으로의 유영만큼 황홀한 몰입, 완벽한 도취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스메타나의「몰다우 강」이며 시벨리우스의「핀란디아」가 벅찬 감동으로 안겨든다. 가락에 노랫말을 싣지 않아도 흐르는 강물소리가 들리고 비 내리는 저녁의 우수가 잡히는 음악의 세계. 경쾌한 새의 지저귐이며 화사한 꽃의 속삭임이 느껴지는 음악. 좋은 음악은 직관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되고 흡수되는 것이 아니던가.



교향악단의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지휘자보다 내가 더 주목하는 이가 있다. 심벌즈를 치는 사람이다. 오케스트라의 제일 뒤쪽 트라이앵글과 팀파니 사이에 배치된 심벌즈는 시종 묵묵하기만 하다. 따분할 정도로 손놓고 그냥 밀랍인형처럼 고정돼 있던 그 사람이 어깨 높이로 심벌즈를 치켜드는 순간, 나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아니 호흡조차 이미 멎어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숨마저 죽이고 지켜보노라면 돌연 직격탄을 쏟아붓듯 힘차게 부서지는 소리, 챙―. 극적 효과를 위한 듯 결정적인 순간 적재적소에서 확실한 구두점을 찍듯이 단호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기(氣)란 기 죄다 모아 한꺼번에 터트리는 강한 에너지의 발산이다. 전심전력 집약시킨 힘을 단 한 번에 내쏟는 열정의 극. 빨려 들어가는 듯한 흡인력을 느끼게 하는 심벌즈 소리. 아예 도발적이기조차 한 그 소리.



  타악기 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초자연적인 힘, 나아가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특별한 힘이 배어있다. 아프리카의 혼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강렬함이 매혹적인 타악기는 기교 모르는 솔직 담백한 점에 마음이 이끌린다. 직설적이라 아주 통쾌 무쌍하다. 마치 막혔던 물꼬가 탁 트이듯 속 시원한 소리다. 압제로부터의 해방감. 맘껏 자유로이 솟구쳐 오르는 그 소리는 매번 나의 숨을 가쁘게 한다.



  타악기 거의가 그러하듯 심벌즈 역시 강한 성정을 타고났다. 태생 자체가 거칠고 야성적이다. 혁명가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가 하면 단순 명쾌하여 더욱 돋보이는 위용이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세계를 단숨에 평정시킨 격전장의 칭기즈칸, 그 서슬 퍼런 기개 닮은 소리. 뭇 짐승을 제압하려 포효하는 숫사자이거나 강풍따라 격렬하게 타오르는 산불의 기세 같은 심벌즈 소리는 결코 배경으로 잔잔히 받쳐주는 악기가 될 수 없다. 계속 연주에 동참하는 현악기와도 또 다르다. 부분부분에서 잠언이듯 간결하고 또렷하게 치솟아 오르는 소리. 혹은 섬세한 음의 조화에 좀 나른해질 듯한 어느 대목. 문득 심벌즈는 긴장을 시킨다. 높이 치켜드는 한 쌍의 둥근 금속판. 번쩍하고 놋쇠판이 빛을 반사한다. 위세 당당한 장군의 견장 마냥 번뜩이는 광채. 그리고 작렬한다. 강하게 아주 강하게.



  레스피기의「아피아 가도의 소나무」와「카르멘」의 전주곡에서 심벌즈는 특히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장 쿵쿵 울려 혈관을 최대한 팽창시키는가 하면 심청이 아버지라도 퍼뜩 눈 떠지게 할 것 같은 확연한 소리. 더욱이 한 단원을 마무리 짓는 심벌즈 소리는 딱 맞아떨어지는 구구단 숫자처럼 얼마나 명료하고 깔끔하던가.



  힘찬 극적 박진감으로 충동적이기만 한 심벌즈. 그러나 동양의 바라는 똑같은 모양의 요철이 나있는 금속 원판의 마주침일지라도 오히려 분위기를 수굿하게 가라앉히는 마력이 있다. 불전에서 재를 올릴 때, 천수다라니를 외면서 바라를 치는 춤사위는 정적(靜的)이고도 신비스럽다. 불교 의식 무용의 하나인 바라춤. 여기서 바라 소리는 강한 치솟음이 아닌 고요한 다스림이다. 잡신의 근접을 막고 부정을 씻기 위해 청수 치듯 소금 뿌리듯 신성하기조차 한 바라 소리. 이렇듯 기질마저 동서양은 판이하게 다르다.



  간혹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혼자 지내고 싶을 적이 있다. 더 나아가 세상사 밖으로 이탈하고 싶어질 적이 있다. 가벼이는 녹작지근한 권태감이거나 괜한 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경우이다. 더러는 존재의 무게에 치일 적일 것이다. 그때 심벌즈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유로운 솟구침이자 강한 신념의 표출인 그 소리는 나약과 침체로부터의 구원의 소리, 해방의 소리다. 그리하여 나는 새로운 의욕과 활력을 전이 받으리니. 단지 혼자이지만 독야청청 올연히 푸른빛, 뿌리 깊은 소나무의 강건함인 심벌즈 소리. 바람 몹시 부는 날이면 그 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진다. - 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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